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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 '경주 용강동 6호 돌방무덤' 공개

[=아시아뉴스통신] 은윤수기자 송고시간 2013-12-12 17:31

'7세기 신라 귀족무덤'으로 추정
 전시 모습.(사진제공=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관장 이영훈)은 지난 10일 특집진열 '7세기 신라 귀족무덤-경주 용강동 6호 돌방무덤' 전시를 공개했다.

 7세기 이후 신라의 왕과 귀족 무덤은 마립간기(5세기)의 대형 무덤(적석목곽묘)에 비해 널리 소개되지 않았던 것은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가 부족한 원인도 있었지만 5세기 무덤에 비해 부장품이 화려하지 않다는 점도 있었다.
 
 6세기 중엽 이후 신라는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마련했으며 왕은 불교를 공인하고 새로운 장법인 돌방무덤(石室墓)을 도입했다. 이때부터 장례는 간소화되고 부장품의 양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지난 1991년 발굴된 용강동 6호 돌방무덤은 경주 용강동 소재 금강산 끝자락의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하고 봉분 지름이 14m이며 봉분의 둘레를 따라 둘레돌(護石)이 돌려져 있었다.

 봉분 중앙에는 남서쪽으로 출입시설을 둔 돌방이 있었고 그 안에는 벽돌(塼)을 깔아서 만든 관대(棺臺·목관을 놓기 위한 자리)가 있었다. 관대에는 주인공의 신분을 짐작케하는 금동으로 감싼 관못과 금동대구(金銅帶鉤·허리띠 연결 걸쇠)가 있었다. 관대 바깥에는 40여 점의 토기류와 지석(誌石·주인공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돌)이 놓여져 있었다.

 바둑돌(사진 왼쪽)과 지석.(사진제공=국립경주박물관)

 특히 용강동 6호 무덤에는 신라의 전통적인 장송의례에서는 볼 수 없었던 중국 문물이 다수 포함돼 있다. 중국 장묘문화로는 벽돌을 깔아서 만든 관대와 주인공의 머리맡에 둔 지석이 있다. 지석의 글자는 대부분이 소멸돼 육안으로는 거의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으로 출토된 것이다. 국내에서는 무녕왕릉 지석 이후로 두번째로 출토됐을 정도로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 계통의 부장품으로는 녹갈색 시유두귀항아리(施釉兩耳壺)와 비파형 금동대구(金銅帶鉤) 등이 있다. 이중 도자기는 6세기 중국(수~당)의 월주요(越州窯)나 장사요(長沙窯)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 주목을 끄는 것은 바둑돌로 추정되는 자갈돌이다. 신라에서는 효성왕 2년(738년)에 신라 사람들이 바둑을 잘 뒀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신라 사람들은 8세기 이전부터 바둑을 즐겼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용강동 6호 석실에서 나온 바둑돌은 신라에서 바둑의 도입 시점이 사서(史書)의 기록보다 1세기 이상 앞선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국립경주박물관 관계자는 "용강동 6호 무덤은 7세기 초에 사망한 신라 귀족의 무덤으로 무덤의 구조와 부장품이 당시 문화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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