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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광역시가 유형문화재 제54호 지정한 아계 이산해 선생의 '기성록 초고본(箕城錄 草稿本)'(사진출처=대전시청) |
조선조 북인의 영수이자 영의정을 지낸 아계(鵝溪)이산해(1539~1609 李山海)선생이 당시 강원도 평해 기성현(箕城縣 현 경북 울진군 평해읍 기성리)에서 유배생활을 기록한 '기성록 초고본(箕城錄 草稿本)'이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54로 지정됐다.
이번에 지정된 기성록 초고본은 아계 이산해의 자필본으로 추정되는 자료로 발문에 따르면 이산해가 1594년 자필로 편찬하고 이들인 이경전(1567~1644 李慶全 전라도 관찰사, 형조판서 역임)에 준 것으로 기록돼 있다.
현재까지 기성록은 이산해의 아들인 이경전이 간행한 '아계유고' 목판본으로만 전해져 오고 있다.
대전시청 관계자는 이번에 지정된 기성록 초고본이 ▶아계 이산해의 필체가 맞다는 점 ▶'아계유고'의'기성록'의 경우 '아계 이산해 기성록 초고본'보다 약 55수 정도 시(詩)가 더 수록되어 있는 점 ▶많은 곳에서 교열 내지 윤문의 흔적이 있는 점 ▶증보된 부분을 제외하면 두 책의 목차 순서가 같다는 점 등을 들어 이산해의 초고본으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기성록은 이산해가 당시 기성( 울진군 평해 기성리)으로 유배생활을 하며 남긴 律詩, 古詩, 絶句를 담은 자필 문집이다.
이산해는 조선조 당시 북인의 영수이자, 좌의정, 우의정, 영의정을 지낸 정치가이자 문장에 특히 능해 선조 때 문장팔가(文章八家)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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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계 이산해 선생이 조선조 당시 기성에서 유배생활 중 해월 황여일 선생과 교류하면서 쓴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소재 해월헌 별구 당액./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
◆정치라이벌 이산해ㆍ정철 울진 망양정 빼어난 풍광 앞에서 화해
이산해와 인연을 가진 울진지방의 명소로는 관동팔경인 망양정(望洋亭)과 월송정(越松亭) 해월헌(海月軒 문화재자료 제161호) 등이 있다.
1593년 54세 되던 해 이산해는 당시 평해 기성으로 유배됐다.
관동별곡을 통해 망양정의 빼어난 풍광을 노래한 송강(松江)정철(鄭澈)과의 정치적 갈등때문이다.
조선조 선조 당시 이산해와 서애 류성룡은 동인, 정철은 서인의 영수였다.
정철이 '광해군 세자 책봉론'을 제기하자 선조는 정철을 유배보냈다.
이산해는 이 과정에서 '정철 제거론'을 강하게 제기했다.
이후 조선 최대의 국난이었던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당시 영의정 이산해는 임금인 선조를 보필해 피난길에 올랐다.
정철은 수도인 한양을 비운 죄를 이산해에게 묻고 선조는 1593년 이산해를 평해 기성으로 유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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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계 이산해 선생이 조선조 당시 기성에서 유배생활 중 해월 황여일 선생과 교류하면서 남긴 '해월헌기(海月軒記)'./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
기성으로 유배된 이산해는 3년 간 유배생활을 하며 기성 사동의 해월 황여일(1556~1622 黃如一 조선 중기 문신, 동래진병마첨절제사 역임) 등과 교류하며 해월헌 현판과 ‘해월헌기(海月軒記)를 남기고 망양정과 월송정에 올라 시를 남겼다.
목판본으로 전하는 '아계유고'에 실린 840수의 시 준에서 절반이 넘는 483수가 기성 유배시절 지은 것이다.
이산해와 송강 정철의 정치적 대립과 갈등은 울진 망양정의 빼어난 풍광 앞에서 화해하며 서로 만난다.
이산해는 당시 12년 전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찾은 망양정(당시 기성현 현종산 기슭, 현 기성면 망양리)에 올라 빼어난 풍광을 담은 시를 남겼다.
송강 정철은 당시 강원도 관찰사 신분으로 망양정에 올라 "하늘 끝을 끝내 보지 못해 망양정에 오른 말이/바다 밖은 하늘이니 하늘 밖은 무엇인고/가득 노한 고래 누가 놀래기에/불거니 뿜거니 어지러이 구는지고/ 온 산을 깎아내어 천지 사방에 내리는 듯/ 오월 장천에 백설은 무슨 일인고" 라며 관동별곡의 대미를 장식하는 '망양정 시'를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