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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칼럼] 윤봉길,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

[대전세종충남=아시아뉴스통신] 이광희기자 송고시간 2020-05-06 14:59

아시아뉴스통신 대전세종충남본사 대표이사
[아시아뉴스통신=이광희 기자] 지난달 29일.
우리는 무심하게 그냥 보낸 날 중 하루였다. 하지만 88년 전 이날은 이 땅의 장부가 일제의 심장에 비수를 꽂은 날이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중국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거사가 있은 날이기에 그렇다.

윤의사는 그에 앞서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 生不還)이란 글귀를 남기고 예산 집을 나섰다. ‘사내 대장부가 집을 나서서 뜻을 이루지 못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의 비장한 각오가 새롭다. 그길로 곧장 중국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그때나이 23세였다.

31년 상해로 들어간 윤의사는 일시에 조국의 독립을 앞당길 방법을 모색했다. 한순간에 몸과 마음을 던져 일제의 기를 누를 방도를 찾았다. 그것은 바로 거사였다. 그것만이 치명타를 안겨줄 방법이었다. 그러던 중에 임시정부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다.
백범과 윤의사는 의혈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했다. 그러다 찾은 것이 32년 4월 29일 천장절 행사였다. 일왕 생일 축하연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을 함께한 의식이었다. 거사가 성공만 한다면 가장 치명적일 거라고 판단했다. 

거사 3일전 이었다. 이번 거사가 개인적 앙갚음이나 분노를 표출한 것이 아니라 한민족의 일원으로 일제를 응징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분명히 했다. 이를 위해 백범이 이끌고 있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한 의거임을 맹세한다’고 선서 했다.

그리고 거사 일을 맞았다. 4월 29일 아침이었다. 윤의사는 백범과 조반을 나누었다. 백범은 그와 나누는 마지막 식사였으므로 밥이 목에 넘어가지 않았다. 수저만 들었다 놓았다. 하지만 윤의사는 차분하게 앉아 아침 조반을 깨끗하게 비웠다. 백범이 복장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윤의사는 낡고 투박한 백범의 회중시계를 보고 바꾸자고 했다. 6원이나 주고 산 좋은 시계라고 말했다. 백범이 왜냐구 물었다. 윤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제 시계는 한 시간 밖에 쓸 수 없습니다.” 그 말에 백범은 목이 멨다. 더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조용히 시계를 바꾸어 주었다. 윤의사는 그길로 승용차를 타고 거사장소로 향했다. 백범은 그에게 후일 지하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날 오전 11시 40분경 윤의사는 상해 홍구공원에서는 개최중인 천장절 행사장 연단 한가운데 수통폭탄을 던졌다. 곧이어 폭발음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땅이 꺼지는 소리였다. 대한의 민중이 일제의 강점을 고래고래 꾸짖는 소리였다. 이천만 민중이 일시에 고함쳐 그들의 혼을 뒤흔드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행사장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단장의 육신 일부가 찢어져 하늘로 날아올랐다. 노무라 중장은 파편에 눈을 맞아 실명했다. 우에다 중장은 다리가 잘려나갔다. 시게미츠 공사는 한쪽 다리에 파편을 맞아 그 자리에 꼬꾸라졌다.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장도 파편을 맞아 나뒹굴었다. 단상에 섰던 이들은 모두 무참하게 쓰러졌다.

윤의사는 도시락을 열려는 순간 현장에서 체포됐다. 도시락은 자폭용 폭탄이었다. 그날 도시락폭탄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윤의사는 승화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도시락이 불발되는 바람에 그는 갖은 고초를 겪었다. 

윤의사는 32년 5월 25일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11월 18일 일제 우편수송선에 태워져 고베항으로 들어갔다. 이어 20일 오사카 성 안에 있는 육군위수형무소로 이감됐다. 그곳에서 근 한 달간 독방생활을 했다. 일제는 다시 윤의사를 12월 18일. 비밀리에 이시가와현 가나자와시 육군 제9사단 법무부로 이송했다. 

이어 이송 하루만인 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15분. 육군 형무소 간수장 다쓰다 소토지로와 간수 2명, 헌병 3명이 함께 윤의사를 끌고 인근 미츠코지산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윤의사를 미리 만들어둔 통나무십자가에 묶고 짚단위에 무릎을 꿇게 했다. 흰 천으로 눈을 가리고 머리를 통나무와 함께 덧 묶었다. 

간수가 윤의사에게 마지막 할 말을 물었다. 윤의사는 담담하게 말했다. 
“앞 단추 좀 풀어주시오. 옷이 조이는 구려. 이왕 가는 마당에 편히 갑시다.”
마지막 말이었다. 

회중시계의 침이 7시 27분을 가리켰다. 홍구공원에서 폭사한 시라카와 대장이 마지막 숨을 거둔 시각이었다. 헌병의 사격 명령에 따라 나카노 군조가 쏜 1발이 ‘탕’하는 소리와 함께 윤의사의 미간을 명중시켰다. 영웅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25세.

일제가 윤의사를 이시가와현 가나자와시 육군 제9사단으로 끌고 가 만행을 저지른 것은 그곳이 상해군의 본진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사로 숨진 시라카와 대장이 일본 제9사단 출신이고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우에다 겐키치 중장이 제9사단장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제는 9사단 군벌들의 보복을 위해 윤의사를 그들의 본진으로 끌고 갔고 시라카와 대장이 숨진 시간에 윤의사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이 얼마나 천인공노할 일인가. 

그들은 윤의사를 참살된 뒤 9사단 인근 일제군전몰장병 묘역 아래 쓰레기 처리장에 버려지듯이 암매장했다. 결국 13년이 지난 1945년 가까스로 유해가 환송됐지만 영웅의 아픔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연말. 윤의사 암장지를 찾아갔을 때 그 초라함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88년이 지난 오늘. 영웅의 거사는 잊혀져가고 있다. 고향 예산에서 조촐한 행사를 치렀지만 전국 어디서도 그를 기억하지 않고 있다. 몇몇 의식 있는 이들만 영웅의 삶을 애닯아 할 뿐이다. 코로나19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세태가 야속하다. 윤봉길은 우리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이기에 그렇다. 
2kwang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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