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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이 땅의 그루터기란?'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7-20 19:13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이 땅의 그루터기란?]

(이사야 6장)

1. 세상은 언제 악할까?

세상이 언제 악하고 언제 악하지 않을까?
항상 악하다.

현재의 세상이 너무 악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과거에는 세상이 현재보다 덜 악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거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보다 결코 덜 악하지 않았음을 본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는 어떨까?
똑같이 악했다. 
그들의 악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셔야만 할 정도로 
이스라엘은 악하고 악했다. 

(사 6:11-12, 새번역) [11] 그 때에 내가 여쭈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12]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심하게 악하고 타락했는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먼 나라로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들을 흩어버리실 정도였다.

지금의 세상은 그 때보다 나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모두 망하고 흩어져야 할 정도로
세상은 심각하게 악하다.

최고로 나쁜 인간들이 그나마 조금 덜 나쁜 사람을
못 죽여서 안달이 나서 날뛰는,
그야말로 악의 전성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과거에도 지금도 세상은 악하다.
세상은 항상 악하다. 

이런 와중에 그 최고로 나쁜 인간들에게 
교회들이 동조하는 모습이니,
교회들마저 악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종교개혁이 일어난 때에 
카톨릭이 타락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지금 교회들의 모습은 당시 카톨릭의 타락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기독교회도 언제나 타락했다. 

기독교가 주류 사회와 영합하는 순간 
온갖 이권과 권력과 야합하면서 깊이 타락한 것은
예전 어느 때에도, 지금도 모습이나 양상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그 본질은 똑같다.

기독교회도 항상 타락의 모습으로 살아왔다고 봐야 한다. 

2. 그래서 필요한 것은?

온 세상도 타락했고 
교회마저 다르지 않은 이때에 
세상과 교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교회도 세상도 회개하고 돌이켜 새롭게 되는 것’, 
또는 ‘교회도 세상도 모두 죄를 짓지 않고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으로 거룩하게 되는 것’
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바람일 뿐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세상은 언제나 동일한 걸 바라고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고, 회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때도 많았지만,
한 나라 전체나 한 나라의 교회들 전체가 
온전히 돌이키고 온전히 회개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걸 바랄 수는 있겠으나
현대의 교회 모습을 보면 
그렇게 온전히 돌이키거나 회개하고 새로워질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사 6:10, 새번역)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이 구절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이 망하길 원하셨다고 이해해야 할까?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결코 돌이킬 마음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함을
하나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온 세상의 타락, 온 교회들의 타락의 한 가운데에서
필요한 것은 세상 전체가 돌이켜 새로워지거나,
교회 전체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현재의 상황만 봐도 전체가 돌이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싶다. 

전체가 돌이켜 새로워지는 것을 
바라거나 기대하기 어렵다면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이 세상과 교회에는 누가 또는 무엇이 필요할까?

(사 6:13, 새번역) 주민의 십분의 일이 아직 그 곳에 남는다 해도, 그들도 다 불에 타 죽을 것이다.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이렇게 타락하고 악한 세상과 교회의 한가운데를 살아가는 이때 필요한 건
‘거룩한 씨’ 또는 ‘그루터기’가 아닐까 싶다.

세상이 타락하고 악해지는 것을 탓하고 
회복되지 않는다고 절망하거나 좌절할 것이 아니라,
악한 세상과 교회를 정확하게 보고 때론 욕도 해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거룩한 씨가 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를 더 걱정해야 할 것 같다.

3. 이 땅의 그루터기가 아닌 사람들

그렇다면 이 땅의 그루터기란 무엇일까?
예배에 빠지지 않고 새벽에 기도 잘 하고 
남보다 많은 헌금을 하고 교회의 모든 행사에 빠지지 않고
목사 잘 섬기고 술 담배 하지 않으면 그루터기가 되는 것일까?

그런 모든 행동들이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그런 행동들만 한다면 분별력이 없어져서 
오히려 나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지금의 시대는 이런 질문들을 할 때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섬긴 목사가 재정비리를 저지르고, 성범죄를 저지른다면?
그렇게 최선을 다해 참석했던 예배에서 
온갖 더러운 세상의 가치관에 근거한 설교만 들었다면?
무리하면서까지 최선을 다해 헌금했더니
그 헌금이 목사의 재정비리를 부추기는 역할만 했다면?

모든 신앙의 행위들이 ‘** 교회’라고 하는
교회에 모이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다면,
그래서 각자 개인의 신앙의 삶에는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은 결코 ‘거룩한 씨’일 수가 없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을 존재는
‘** 교회’라고 불리는 교회를 부흥시키는 것에만 집중한  
‘교인’들이 전혀 아니다.
하나님이 타락한 교회들을 심판하실 때
교회 중심으로만 신앙생활을 한 교인들은 함께 망하지 않을까 싶다. 

4. 이 땅의 그루터기란?

그렇다면 하나님의 심판에서 누가 살아남을까?
누가 이 땅의 그루터기가 될까?

모두가 불에 타서 없어져야 할 때에
그 속에서 살아남는 거룩한 씨,
즉 이 땅의 그루터기는 어떤 사람일까?
그 모습을 이사야가 보여준다.

이사야는 두 가지의 경험을 했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봄

(사 6:1, 새번역)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
그런데 그 때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다. 
무슨 의미일까? 

웃시야는 이사야와 먼 친척이었다고 한다.
웃시야로 인하여 이사야는 조금이라도 혜택을 입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웃시야 왕이 죽었다.
이사야의 삶에 큰 위기와 아픔이 찾아온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때에야 이사야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보았고,
그 영광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는 걸 보았다.

그 전에 무수하게 성전으로 갔을 것이고,
무수하게 많이 제사했을 것이고 
기도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때에도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보지 못했다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비로소 본 것이다.

삶의 위기와 아픔과 슬픔이 찾아올 때는
신자에게 위험한 때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경험할 때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위험을 안고 하나님께 나가느냐
아니면 그 절망과 위기에 함몰되어 있느냐가 
그 놀라운 경험을 하느냐 하지 못하느냐를 결정할지도 모른다.

둘째, 자신의 죄를 봄

이사야는 두 번째의 중요한 경험을 했다.

(사 6:5, 새번역)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기쁨과 감격으로 충만하여
뜨겁게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할까?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경험했다면
그건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보고 만난 것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본다면
가장 먼저 나올 반응은,
‘내가 재앙을 당하겠구나’이다.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보기 때문이요,
그 죄가 너무나 추해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음이 깨달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죽게 되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고 
그 거룩하심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너무나 추하고 더러운 죄를 보는 사람은
화를 입고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사람만이 놀랍게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사 6:8, 새번역)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삶의 위기와 아픔과 슬픔 속에서 
그 위기와 아픔과 두려움에 함몰되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충만한 영광을 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의 추악한 죄를 발견하고
주님 앞에 엎드린 사람만이
‘거룩한 씨’요 ‘이 땅의 그루터기’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참으로 그렇게 ‘거룩한 씨’로 살아가고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아가는 사람은
결코 다수일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다수가 아니라 소수였다.

하나님이 보내시지도 않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했고
자신의 죄의 추악함을 적나라하게 보지도 못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누구를 보낼까?’하고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라고 설레발치는 사람이
오늘날 교회들에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런 자들에게 속아서
자신의 신앙의 운명을 다 맡기는 것만큼
어리석고 바보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거룩한 씨’를 찾아서 그를 섬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거룩한 씨가 되고 이 땅의 그루터기로 살아가려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이 시대의 참된 신자일 것이다.

5. 나는?

신대원에 다닐 때 다소 충격을 받은 사실이 있다.
아무리 봐도 신학생이면 안 될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이 거기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람이 나중에 목사가 되어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신앙이 더 좋은 성도들이
사실은 신앙이 엉망인 목사를
신앙의 스승으로 모시는 셈이 되는 것이니,
둘 다 함께 구렁텅이로 빠질 것이 뻔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분별력을 가지지 않은 교인들은
망할 수밖에 없는 시대임을
신대원에서부터 느끼며 공부를 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더 절박했던 것 같다.

말씀 하나 외에는 관심을 갖지 말자고 
그때부터 결심을 했고,
학원 운영하고 신대원 다니고 교회를 개척해서 섬기는
세 가지 일을 빡세게 하면서도 
매일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삶을 걸었다.
뻘짓하는 목사는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점점 깨달아지는 것은,
말씀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생명 같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말씀을 묵상하면 할수록 
나의 죄가 더 깊이 보이고 깨달아졌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은 언제나 나의 죄와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래서 점점 눈물이 많아졌다.

나는 ‘누가 날 위해서 갈꼬?’ 하고 주님이 물으실 때
‘제가 가겠습니다. 저를 보내소서.’라고 
결코 대답할 수가 없었다.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 시대의 형편을 
점점 더 적나라하게 보게 되었다.
방송에서 설교 단상에서 하는 헛소리들을 들으면서
속으로부터 욕이 올라오는 것을 참고 있는데,
화면이 돌아가서 청중석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청중 중 몇 사람이 울고 있었다.

몸이 얼어붙은 듯 나는 잠시 모든 것이 정지했다.
뱀장사가 장사하듯 천박한 소리들을 지껄이는
그 말도 안 되는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고 우는 사람들이 교인이기 때문에
저렇게 설교할 수 있구나 싶었다.

이 시대 교회들의 문제는 목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헛소리하는 목사를 분별하지 못하는 교인들의 문제이기도 함을
그때 가장 선명하게 본 것 같다.

나는 여전히 한없이 부족하지만
부족한 중에 나에게 주신 은혜라도
최선을 다해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죄를 적나라하게 본 그 때에
이사야가 ‘저를 보내소서.’라고 말한 이유를
아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나는 지금도 너무 부족한 사람이다.
너무나 부족해서 매일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목사로서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것 같다.
아니, 매일 말씀을 묵상하지 않으면 
신자로서 바르게 살아갈 수나 있을까 싶다.  

나는 그저 나의 이 삶을 있는 그대로 
함께 하는 분들에게 나누려 한다.
위대한 목사, 훌륭한 사역자, 탁월한 설교자 따위에는
1도 관심이 없다.
교회를 숫자적으로 부흥시키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그런 것 하고 나는 타락한다면
그것보다 바보같은 짓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목사로서 나의 최종 목표는 
‘끝까지 타락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매일 받는 은혜를 성도들과 나눌 것이다. 
그것 외에 별 다르게 내가 무언가를 만들어서 
‘위대한 사역’으로 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다.

매일 받는 은혜가 아닌
과거에 받았던 은혜만 나누는 사람이 된다면,
가르치는 기술이 탁월하거나 
가진 컨텐츠가 탁월해서 인기몰이를 하는 사람이 된다면
가는 목사로서는 망하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컨텐츠가 아니라, 기술도 아니라
‘지금 만나고 있는 하나님’,
‘지금 누리고 있는 은혜’,
‘지금 만나는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죄인 됨’을
정직하고 담백하게 나누는 사람으로만 
끝까지 살아가고 싶다.

별다른 목회 기술이 없는,
그저 이렇게 부족한 목사일 뿐인데 
놀랍게도 성도들 한분 한분이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을 보는 기쁨마저 누리고 있으니,
나는 참으로 복 받은 목사임에 분명한 것 같다.

이렇게 부족한 목사인데
온라인으로 묵상 세미나를 하고 
제자양육 성경공부를 진행할 때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참여해주시는 것은
참으로 나에게 과분한 복이다. 

이렇게 참여하시는 한 분 한 분들도 
말씀의 사람이 되어가시길,
그래서 이 땅의 곳곳에 그루터기들이 세워져 가길
간절히 소원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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