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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순천 평화공원 조성에 앞서 왜교성전투의 가치부터 규명

[광주전남=아시아뉴스통신] 양도월기자 송고시간 2020-09-24 17:08

-왜란의 마지막 전투는 노량해전이 아닌‘순천왜교성전투’으로 바꾸어야
-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체는 전라좌수영이다.
-전근대적인 동상이 아니라 위령탑을 조성하여 반면교사로 삼아야
순천시가 평화공원을 만들고자 발주한 조성도./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최근 반일정서에 반하여 순천시가 순천 왜성 인근에(구 충무초등학교) 평화공원을 조성하고자, 순천시가 입찰 공고를 하면서 조선 이순신 권율 장군, 명나라 진린과 등자룡장군, 왜군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무명병사 군상등의 동상을 건립하고자 사업에 포함하면서 발주한 것이 문제가 되어 시민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다. 

순천시는 이와 같은 사업을 추진하면서 국민 정서를 외면하고 전쟁을 주도한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동상까지 건립한다는 것에 대해 시민들이 크게 반발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에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명나라 등자룡의 위상을 관광산업에 연계시키고자 그동안 순천시와 남해군은 앞다투어 사대 외교에 가까운 중국의 관심 끌기에 열중한 것 또한 비판받을만하다는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 그리고 1597년의 정유재란에서 그 전쟁의 중심은 이곳 전라도 좌수영이었지만 역사적 연구나 조사가 부실하여 충무, 통영, 남해등 경상 우수영이 더 이순신의 역사적 가치를 활용하다 보니 오히려 전라좌수영에 속한 지자체에서 뒤늦게 역사적 가치를 활용하려다 무리하게 일명 평화공원을 만들다 보니 자초한 일이었다.
 
지금 남해 관음포 해변엔‘사적 제232호 관음포 이충무공전몰 유허지’가 조성되다 보니 순천 왜성에서 조선 명나라 일본 3국의 치열한 전투가 노량해전이라는 생뚱한 해전에 묻혀 버리고 말았던 것을 우린 상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지역의 사학자와 동부지역사회 연구소 등 시민단체 등이 10여 년 전부터 순천 왜성의 역사적 가치와 재평가를 위해 노력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동북아 3국의 치열한 16세기 국제전쟁을 재평가하고 이곳에 역사공원을 만들자고 주장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순천왜성앞 이순신 장군이 주둔한 장도의 현재모습./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그러나 정부와 지자체는 16세기 동북아 최초의 3국 전쟁의 역사적인 장소를 망각하고 신성포 앞바다를 매워 공장을 건설하고 이순신이 머무르고 항전한 장도를 발파시켜 바다를 메우고 말았던 것이다.
 
순천 왜성 천수대에 올라보면 보이는 것은 공장뿐이라 그 당시의 치열한 전쟁의 상흔과 역사적 가치를 증명하기에는 여건이 턱없이 부족한 것을 알 수가 있다.
 
더군다나 이번에 평화공원 조성지가 왜성 바로 아래 드넓은 땅이 아닌 왜성 천수대에서 약 1킬로 떨어진 모 언론사 소유의 구 충무초등학교에 조성한다는 것 또한 의혹을 살만하다는 것이다.
 
순천왜성 항공사진./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약무호남시무국가’ 충무공이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보낸 편지 내용에 적힌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을 것이라는 내용으로 당시 전라도의 중요성과 그 역할을 상징한 말이 아니던가.
 
우리가 알다시피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거북선을 건조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남해안을 장악한 이순신의 수군 때문에 왜군이 해상보급로를 한양으로 연결시키지 못해서 결국 철수한 것이 아니던가.

공교롭게도 경상우수영의 원균이 이순신을 모함하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으나, 결국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칠전량 해전에서 일본의 유인책에 빠져 연전연승으로 막강하던 조선의 수군을 12척의 초라한 수군으로 패전했으나 그나마 전라도 수군들이 명량대첩에서 승전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은 것이다.
 
그러나 정작 전라좌수영의 본거지인 여수와 순천은 이충무공의 역사적 가치를 외면하고 여수엑스포유치와 신성포 앞바다를 메우는 등에 치중하다 보니 결국 통영, 충무, 남해등 경상우수영과 비교하면 전라좌수영에서의 이순신의 위상과 가치의 연구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지금이라고 순천왜교성 평화공원 조성에 앞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역사적인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본다.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의 시작은 순천 왜성에서 3개월 이상 고립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하고자 사천 부산 등의 왜군들이 남해로 들어오고 순천 왜성에서 빠져나가는 왜군을 뒤쫓아가며 전투를 한 것이 시작이었다.
 
순천왜성에서 시작된 전투가 노량을 지나온 사천의 왜군과 전투를 벌인곳./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왜군이 사전 밀통하여 노량에서 합류한 왜군과의 전투에서 200여 척의 일본 수군이 격파되고 패잔 선박 50여 척만이 관음포 방면으로 겨우 달아난 것이다. 지금의 광양 포스코 앞바다쯤에서 조선, 왜국, 명나라 삼국의 치열한 해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에 이순신은 관음포 인근에 이르러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도주하던 적을 추격하다가 왜적의 흉탄에 맞고 쓰러졌다. 이에 남해군은 관음포에 ‘이충무공전몰 유허지’를 만들어 공원화를 먼저 함으로써 여수나 순천에 비해서 앞선 역사적의 식견을 보인 것이다.
남해군 관음포 앞바다에 조성된 이충무공전몰유허지./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결국, 박정희 정부가 주도한 근세 역사는 노량해전을 마지막 전투로 기록하지만, 실상은 검단산성의 권율, 장도의 이순신, 묘도의 진린등이 3개월 동안 지속한 전투인 ‘순천 왜교성전투’이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로 위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지역 사학자들의 주장이다.
 
권율장군이 주둔한 검단상성에서 바라본 왜성앞바다./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노량해전이 아니란 이유는 명량해전처럼 독단적인 전투가 벌어진 것이 아니라 순천왜교성에서 시작된 전투에 왜군이 노량을 지나왔다고 해서 노량해전이라고 한 것은 잘못된 주장이란 것이다.
 
순천 왜성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군의 호남 공격을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하여 쌓은 왜성으로 지역의 수많은 백성이 노역했으며 왜군에게 죽임을 당한 원혼들과, 귀 무덤으로 대변되는 일본의 만행과 수많은 포로 등이 일본으로 끌려간 사실 등을 비춰볼 때, 특정 장군들의 동상을 세우는 전제 국가적인 사고방식이 아니라, 철저한 역사고증으로 사실관계를 정립하고 억울한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 정도는 가능하다는 것이 일반 시민들의 주장이다.
 
순천왜교성전투 -명나라 황실의 종군화가가 그린 정왜기공도권(征倭紀功圖卷)./아시아뉴스통신=양도월 기자

공무원들의 인문학적인 지식이 없이 무분별하게 개발에만 치중하다 동북아 최초의 3국 전쟁의 흔적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승전을 기리는 기념비적인 터전을 우린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그 흔적을 스스로 없애면서 그동안 철저하게 무시하다 뒤늦게 특정 단체 특정인을 챙기는 사업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번 기회에 순천왜교성 전투의 가치를 바로 정립하여 16세기에 벌어진 동북아3국의 치열한 해전을 ‘순천왜교성전투’으로 기록하여 임진왜란의 패전국이 아님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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