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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집! House인가? Home인가?

[전북=아시아뉴스통신] 이두현기자 송고시간 2020-11-09 09:27

집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
집은 문화적‧ 사회적 ‧ 경제적‧ 심리적으로 복합적인 공간
집은 삶의 고달픔을 풀고 공존하면서 행복해지려는 우리들의 염원
정성수 시인./아시아뉴스통신DB
집은 '삶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House 또는 Home이라고 한다. House는 집을 의미하지만 Home은 원래 고향 마을이나 도시를 의미했다. 사생활 개념이 생기면서 Home은 사람에게 대단히 소중한 곳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새는 둥지를 가지고 있고 여우는 굴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은 집을 가지고 있다. 안타깝게도 현대인들 중 많은 사람이 자기 집이 없다. 집 없는 설움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파트를 비롯해서 초가집, 황토집, 오두막집, 통나무집, 판잣집 등 수많은 집들에 묻혀 살면서 하룻밤 몸을 쉴 곳이 없는 막막함을 대할 때 고독감과 소외감은 뼈저린 슬픔으로 다가 온다. 우리에게 집이 없다면 절망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임시적‧잠정적인 집이 아니라 필요할 때 언제든지 편히 쉴 수 있는 집이 있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영혼이 쉴 수 있는 집이야 말로 진정한 내 집이다.

우리의 전통적인 집은 흙과 나무와 모래와 볏짚들이 모여 이루어졌다. 아파트는 시멘트와 철골이 주재료로 된 집이다. 집은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비 같은 자연들이 함께 한다. 사람들은 좋은 집은 돈이 되는 집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집은 신분 상승과 욕망의 종결 자가 되기도 하고. 위험을 끌어 앉고 악몽을 꾸면서 새우잠을 자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욕망의 바벨탑이 되는 집이 누구에게는 절망의 외딴 방이 되기도 한다.

House는 물리적 존재가 강한 뉘앙스가 풍기는 반면 Home은 실체보다 추상적인 의미로 편한 곳 또는 내가 사는 공간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I'm house’는 ‘나는 집이다’지만 ‘I'm home’은 ‘나 왔어’로 번역되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집을 무생물인가? 생명체인가? 로 구분한다면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무생물이고, 생태학적 관점에서는 생명체다. 생명을 죽이는 집이 될 수 있고 생명을 살리는 집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차이다. 집 때문에 울기도하고 집 때문에 웃기도 한다.

이런 글을 보고 마음이 짠해지기도 했다 ‘드디어 아파트를 사 이사를 하고 첫 밤을 맞았다. 어린 시절 남의 집 문간방에 살던 때 이사를 가야한다고 짐을 싸는 어머니에게 왜 갑자기 이사 가야 하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집세를 너무 올려달고 해서 할 수 없이 집을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놈의 돈이 웬수라며 눈물 바람을 하셨다. 그날 밤 아버지는 마당에서 줄담배를 피면서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죽기 살기로 돈을 모아 드디어 보일러가 돌아가는 아파트에 눕는다.’ 이 땅에는 이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높은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아파트 단지나 방법용 카메라로 둘러싸인 도시의 주택가는 삭막함 그 자체다. 납작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촌은 생존의 고달픔이 묻어나지만 거기에는 치열한 삶이 있다. 산기슭 자리 잡은 외딴 시골집은 고독을 말하고 있지만 고독 속에서 한없이 깊은 휴식감이 보이기도 한다.

무너지거나 헐린 집은 꿈의 패배를, 새롭게 지은 집은 삶의 확장을, 수리된 집은 삶의 알뜰함을 의미한다. 세상의 모든 집들은 다 같이 삶의 고달픔과 삶의 즐거움을 말해 준다. 뿐만 아니라 근원적인 존재 형태는 사람의 무한한 이야기를 속삭인다. 열린 아파트 창문에서,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 지붕에서, 산 아래나 들녘에서 이마를 대고 자리 잡은 시골집에서 다양한 삶의 숨소리를 듣고 인간적 체온을 느낀다. 그것은 삶의 고달픔을 풀고 나아가 공존하면서 행복해지려는 우리들의 염원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에서 실을 뽑아 지은 누에고치는 10일만을 위한 집이다. 자신의 침을 섞은 진흙으로 만든 제비집은 6개월을 위한 집이다. 나뭇가지를 물어 오느라 입이 헐고 꼬리가 빠지는 힘으로 지은 까치집은 1년을 위한 집이다. 곤충이나 날짐승은 혼신을 다해 집을 지었어도 때가 되면 미련 없이 집을 버리고 떠난다. 그러나 인간들은 이재를 생각하며 끝까지 움켜쥐고 있다가 결국 빈손으로 간다.

이 세상 어디에도 완전한 소유는 없다. 생물체는 살아있는 동안 자연에서 모든 것을 잠시 빌려 쓰다가 떠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사람이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것은 물질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음이다. 결국 마음속에서 얻은 것이 진정한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이다. 많은 것을 집에 쌓아두고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을 우리는 현대인이라고 한다.

홀로 버려진 채 낡아가고 있는 집들은 얼마나 쓸쓸한 풍경인가?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슬프다. 빈집을 어떻게 위로할 수가 없다. 그렇기에 집을 위한 집은 집이 아니다. 집에는 가족이 있어야 하고, 좋은 집은 항상 가족을 위해 지어져야 한다. 집은 물리적 공간이기도 하지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혹은 살고 있을 사람들의 몸과 생존의 행태를 암시하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집은 문화적‧ 사회적 ‧ 경제적‧ 심리적으로 복합적인 공간이다.

현관문을 열면 집안의 따뜻한 온기로 안경에 하얀 김이 서리며, 하루의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면 어깨가 편해야 집이다. 한 몸을 맘 놓고 쉴 수 있는 절실하고 소중한곳이어야 집이다. 으리비까한 House보다 반질반질 윤나는 Home이 좋다. House를 Home으로 바꾸는 비결은 각자의 마음에 달렸다.

필자: 정성수 시인/향촌문학회장, (사)미래다문화발전협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이사

[아시아뉴스통신=이두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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