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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남원의 샘(7)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샘, 소석마을 샘

[전북=아시아뉴스통신] 이두현기자 송고시간 2021-01-28 08:39

비전마을은 ‘샘은 없애는 것이 아니다’는 옛말에 따라 석축 쌓아 보존
소석마을은 가뭄에도 변함없이 물이 솟아나고 있어 마을 자랑거리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비전길 14. 비전마을 샘./아시아뉴스통신=남원문화원 김현식

[아시아뉴스통신=이두현 기자]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209번지에 비전마을이 위치해 있다. 비전마을은 본래 운봉의 서면 전촌리(前村里)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전촌리(前村里), 옥계리(玉溪里), 소석리(小石里) 일부가 병합되어 화수리(花水里)에 편입되었다.
 
비전마을은 동편제가 처음 시작된 곳이다. 가왕(歌王)의 칭호를 받은 송홍록(1780년)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송홍록은 철종(1859년) 정3품 통정대부 벼슬에 제수된 명창이다. 한국국악협회 초대 이사장을 지낸 국창 박초월도 이 마을에서 살았다.
 
비전마을은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도운 마을이기도 하다. 고려 우왕 6년(1380) 이성계와 휘하 장수들이 수많은 왜구들을 물리친 역사적인 장소이다. 지명만 놓고 보면 언뜻 외래어처럼 보이지만 황산대첩비 앞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돌기둥 비(碑)자와 앞 전(前)자를 써서 비전(碑前)이라 하였다.
 
황산대첩비는 왜구를 황산벌에서 크게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다. 황산대첩비각은 고려 우왕 6년(1380년)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선조 10년(1577년) 운봉현감 박광옥이 세웠다. 그 후 이 대첩비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파괴되었다. 현존의 비각과 비석은 8·15광복 후 1957년 10월 27일에 다시 재건한 것이다.
 
운봉 현감은 이 대첩비각을 세운 후 참봉과 몇 사람의 관원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였다. 이에 그 식솔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서편에 하마정이 있어 말을 탄 관리가 황산대첩비각을 지날 때면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는 이곳에서 말을 내려 걸어와 비 앞에서 절을 하였다고 하는데 이곳에는 구한말까지 2층 정자가 있어 주변 주막의 기녀(기생)와 소리꾼, 가마꾼(轎軍)이 상주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비전을 역촌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고려 말 조선을 왜구가 진포에서 최무선 장군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갈 수 없게 된 수천의 왜구들이 내륙으로 숨어들어 함양, 인월 등에서 약탈과 살상을 일삼으며 큰 피해를 입혔다.
 
고려 우왕은 1380년 이성계 장군을 삼도순찰사로 임명하고 변안렬 장군을 도제왕복명, 우인열, 도길부, 박임종, 홍인규, 임성미, 이원계, 퉁두란을 8원수로 정몽주, 장사길, 남은, 배극렴을 4종사관찰사로 삼아 1천여 명의 군사로 하여금 왜구를 섬멸하도록 했다.
 
주민들에게 구전되는 설화가 있는데 ”당시 왜장은 아지발도였다. 두꺼운 갑옷을 입어 섣불리 죽일 수 없었다. 생각 끝에 아지발도의 투구에 화살을 쏘았고 이에 놀란 아지발도가 ‘악!’하고 입을 벌린 사이 이성계가 그 목구멍에 화살을 쏴 죽였다”고 한다.
 
이성계는 황산대첩 다음해 이 마을을 다시 찾아 손수, 1년 전 황산의 왜구들을 물리치고자 전의를 불태운 이곳 자연암석에 당시 참가했던 장수들의 이름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소석리는 바래봉(1,165m) 지맥이 슬며시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덕두봉(德頭峯, 1,150m)을 동쪽으로 끼고 폭 1㎞, 길이 약 4㎞의 옥계동의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다. 옥계동 서쪽 산등성이를 넘어서면 오랜 침식과 풍화로 형성된 완만한 서편 기슭이 길게 타고 내려와 24번국도 못미처 잔등평전이란 평지를 이룬다. 바로 이곳에 자리한 마을이 소석마을이다.
 
소석마을은 1674~1720년 숙종 연대에 평산신씨, 이씨, 범씨 등이 처음 들어와 터를 잡고 이후 여러 성씨들이 입주하며 마을이 크게 형성되었다.
 
처음 정착한 세 성씨들이 마을에 처음 터를 잡을 때 주위가 큰 소나무 숲에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었으므로 소나무에 싸인 작은 마을이라 하여 소송(小松)이라 하였다가 후에 마을 뒷산에 잔돌이 많아 ‘작을 소(小)’자와 ‘돌 석(石)’자를 써서 ‘소석(小石)’으로 개칭하였다.
 
마을 뒷산에 매방골이 있는데 이 골짜기는 예로부터 원님이 1년에 몇 차례씩 나와 매사냥을 했던 곳으로 전해진다. 과거 매방골에서 흘러내린 골짜기 물을 물넘기틀로 넘겼는데, 이곳을 물고개라 하며 물고개로 넘어 온 그 물로 소석리에서는 농사를 지었다.
 
비전마을 샘
지난 2000년도에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비전마을 중심부에 송흥록 생가와 박초월 명창의 고택이 복원되었다. 생가 우측 골목으로 돌아가면 길이 두 갈로 나눠지는 우측 아래에 샘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 도로를 확포장 하면서 샘이 도로 밑으로 들어갔는데 샘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는 옛말에 따라 샘 위로 석축을 쌓고 길을 포장하였다.
 
샘의 형태는 사각형으로 깊이 164cm, 수위 140cm, 가로 97cm, 세로 97cm, 수온 17℃이다. 지표면에서 약 1.7m 깊이로 굴착하였고 바닥은 암반이며 샘 내부는 원형 콘크리트 관을 설치하고 지상부는 사각 콘크리트 구조이다.
 
소석마을 샘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소석길 78-4. 소석마을 샘./아시아뉴스통신=남원문화원 김현식

남원시 운봉읍 화수리 소석마을회관에서 우측으로 약 50여 미터 올라가다 우측 길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 공동샘이다.
 
샘의 형태는 사각형으로 깊이 106cm, 수위 85cm, 가로 145cm, 세로 145cm, 수온 17℃이다. 물색이 맑고 투명한 숫물이다. 지표면에서 약 1m 깊이로 굴착하였는데 바닥에 자갈을 깔고 사면은 잘 다듬은 대리석으로 둘렀으며 지표면은 판석을 설치하였다.
 
샘에 이물질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덮개를 설치하였다. 샘이 길보다 아래쪽에 위치하여 주변을 석축으로 쌓고 바닥은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샘 내부에 물이 빠져나가는 수구를 파이프로 설치하였는데 파이프를 통해 나온 물은 돌확으로 떨어져 사람들이 마실 수 있도록 하였다.
 
2차로 돌확을 거쳐 흐르는 물이 직사각형 수조에 모이는데 이 물은 채소를 씻거나 빨래 증 허드렛물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마을 사람들 말에 따르면 소석마을이 크게 번창했을 때 70여 호가 살았는데 이때도 마을 전체가 이 샘물을 사용할 정도로 수량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가뭄에 크게 변함없이 물이 솟아나고 있으며 마을의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다.(출처. 남원문화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dhlee30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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