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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양(梁)씨 재도 부인 열녀(烈女) 전주이氏 효열비각 현판, 제막 봉행

[전북=아시아뉴스통신] 유병철기자 송고시간 2021-06-07 16:24

비각 현판 봉헌, 열녀 전주李氏 5세손 양영두(사선문화제 위원장)에 의해 봉행
'남원 양공 재도부인 열녀 전주이씨 효열비각' 현판 봉행 제막에 참석한 5대손 양영두 사선문화제전 위원장(가운데) 글을쓴 계남 송기상 선생 서각을한 무형문화재 명장 김종연선생, 최한규 회봉리 이장, 이종명 사선문화제 부위원장이 봉행식에 참석./아시아뉴스통신db

[아시아뉴스통신=유병철 기자] 1800년대 열녀(烈女) 전주 이 씨에 대한 조정(정부)의 포장 내용이 뒤늦게 후손에 의해 알려져 화제를 낳고 있다.

1869년 당시 하북면(下北面) 지금의 (임실군 관촌면, 진안군 성수면, 완주군 상관면 일대) 거주 최주하 등 33인이 성주(군수)에게 청원(상서)을 내고 하회촌(회봉리) 거주 전주 이 씨를 포상해 달라고 청원한다.

상서 기록에 따르면 부인 이 씨(당시69세)는 남원 양공재도의 아내인데 32세 때에 딸 셋이 있고 임신상태였는데 남편이 세상을 떠나게 된다(36세). 다행히 유복자가 아들(하권)로 이어져 대(代)를 잇게 되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섬기며 봉양하고 자식 양육을 엄하게 하여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성서 표지./아시아뉴스통신db

남편이 세상을 뜨자, 고기와 양념된 음식을 먹지 않고 3년상을 치르고, 삯바느질, 방앗품등으로 생계가 궁핍하지 않게 가정을 이끌고, 선대가 남원에서 정유재란(1599년)에 전재를 입어 임실로 온 집안 이어, 문적과 위토 선산 등 남이 가로챈 것을 남원부에 달려가서 소송을 제기해 기어코 다시 찾아내는 등 옛적 열녀(烈女), 효부(孝婦) 보다 더 훌륭하다고 칭송하며, 양 씨 가문이 8代를 독자로 내려왔는데 그 가운데 집안의 명예를 지켰다고 밝혔다.

한 부인의 몸으로 이 효도와 열의 두 가지 절행을 겸하여 행하기란 극히 어려운 것인데 그것을 행(行)한 사람이다.

이후, 1870년 임실의 유생(儒生) 오흥수 등 11인이 전라관찰사에게 상소해 조정(중앙정부)에 포장 상신해 줄 것을 제문을 만들어 청원했고, 조정(중앙정부)은 포상을 결정했다.

이氏 부인은 1800년생으로 전주 李씨 왕족인 회안대군 12세 손인 장의의 따님이며, 하권의 아버지 휘재도는 남원인 병부공 후예로서 홍문관 대제학, 한림학사인 준(俊)의 20세손으로 5대에 걸친 진사 등 남원 석유(碩儒)이며 전라도인의 명망 있는 집안이라고 밝혔다.

양씨 가문은 1599년 임진왜란 정유년에 남원성이 불타 전재를 입고 임실군 관촌면 회봉촌으로 이거에 되었다.
 
현판은 계남 송기상 선생이 쓰고, 무형문화재인 명장 김종연 선생이 서각 했다.
양영두 사선문화제전위원장./아시아뉴스통신db

효열 비각은 후손인 고양창석 선생이 생존 세워졌고 단청은 2010년에 완성되었고 비각 현판 봉헌은 열녀 전주李氏 5세 손인 양영두 (사선문화제 위원장)에 의해 봉행되었다.

ybc910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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