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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존경의 마음'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09-18 05:00

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Ph.D./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오래 전 서울의 신대원에서 공부할 때, 교실에서 물었던 질문이 생각난다: 우리 나라 정서로는 어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데, 우리 말 성경이나 찬송가 속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존칭 없이 사용되고 있는데, 교정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었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 나셨느니라,"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찬송가 144장 처음 가사).

그때 교수님은 그 질문에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싶었다. 시원한 대답을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 질문은 지금도 종종 생각나고, 묻고 싶은 질문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사실 때, 지니셨던 이름이다. 마치 내 이름이 김희건인 것처럼. 그런데 교인들이나, 학생들이 내 이름을 존칭없이 김희건! 부른다면, 기분이 언짢을 것 같다. 

이런 문제는 미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친할수록, 어른, 아이 가리지 않고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한다. 손자도 John, Peter등 할아버지 이름을 부를 때, 서로 친밀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남여 간에도 서로 알고 친함을 확신할 때, 칭호보다, 이름을 불러 주기를 원한다. 이런 문화는 한국의 정서, 문화와 사뭇 다르다.

그런데, 백여년 전, 한국에서 성경이 번역될 때, 미국 사람들이 번역한 성경이 한국에 들어와서, 현재의 번역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 당시는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커서, 한국 신자들은 그들의 가르침을 받고 살면서,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예수로 사용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령에 대한 번역도 마찬가지다. 성령은 삼위 하나님의 한 분이시다. 그런데, 신약 성경에는 성령에 대한 존칭없이 사용되고 있다.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 28).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케 하옵시고"(엡3: 16). 

신앙 생활은 각 나라 정서와 문화 속에서 표현이 다를 수 있다. 우리 한국 문화는 유교 문화의 큰 영향을 받아 왔기 때문에 나이든 사람, 존귀한 사람에 대한 공경하는 표현을 필요로 한다. 그런 정서를 무시하면, 관계가 소원해 지고, 거칠어 질 수 있다. 지금 나는 케케 묵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는가,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 마음, 신앙의 자세와 무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평소 우리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대하는 마음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우리 마음의 자세의 표현이다. 사람에 대해서도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대하는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예수님을 예수라고 부르는 것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똑같지 않다. 성령 하나님을 성령이라고 부르는 것이 성령 하나님에 대한 바른 표현일까? 자칫 존칭 없이 부르는 삶에 익숙해서, 하나님에 대해 마땅이 우리가 표현해야 할 존경의 마음도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러운 것이다. 

사도들은 하나님, 예수님에 대해 언급할 때, 항상 존귀와 영광을 올린 것을 볼 수 있다.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토록 그에게 있으리로다"(롬 11: 36). "권력과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찌어다" (벧전 5: 11). 우리도 그 마음을 찾고 하나님을 마땅히 존중할 자로 존중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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