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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예언이면서 계시인 책'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12-26 04:01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예언이면서 계시인 책(요한계시록 1:1∼3)

[1]
복음서에는 확실하게 예수님이 드러나 있기에 사이비ㆍ이단이 복음서만을 가지고 이상하게 해석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자신들의 정체가 그대로 드러나기에 그런 일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서를 <요한계시록>이라는 창을 통해 해석하는 순간부터 이상한 게 등장합니다. 복음서와 이 책 중에 해석의 우선권은 복음서에 있습니다. 복음서는 예수님이 한 말씀을 여러 사람이 들은 것이고, 이 책은 요한 혼자서 환상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의 눈으로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사이비ㆍ이단들은 거꾸로 이 책으로 복음서를 읽습니다. 복음서가 이 책보다 더 묵시적인 책인데 거꾸로 말합니다. 이건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묵시가 뭡니까? 2천 년 전에 인간 평등,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증언한 것보다 더 묵시적인 메시지가 어디 있습니까? 복음서가 묵시적이지 않다고 하면 그건 완전히 거짓입니다.

[2]
요한은 <21:2ㆍ9>에서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명시했습니다. 그렇다면 새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그분의 피 값으로 산 그분의 몸이자 신부인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신비적으로 체험한 천국을 설명하는 말로 <요한계시록>에 나온 새 예루살렘을 인용했을 때, 이는 당연히 특정한 소수 집단만이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는 배타적인 해석으로 치달립니다. 그리고 그 특정 소수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기독교 일반 윤리는 깡그리 무시됩니다. 이 책에 나온 새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하고, 12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는 12문은 약속으로서의 구약 백성, 12사도의 이름이 쓰여 있는 12기둥은 그 성취로서 신약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의 구성원은 어느 소수 집단이 아닌 전체로서의 교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모든 교회 공동체가 됩니다(고린도전서 12:3). 따라서 이 책이 말한 새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지, 특정한 절차를 거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3]
천국에 대한 묘사의 또 다른 예로 하나님의 보좌가 나온 <4:1∼6>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묘사된 게 과연 천국의 실제 모습일까요? 고인이 된 소설가 박완서(朴婉緖)는 그녀가 쓴 소설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이런 천국이라면 자신은 가고 싶지 않다’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천국은 마치 고향 언덕의 잔디밭과 같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남미 작가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천국은 도서관과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럼 박완서나 보르헤스가 그리고 있는 천국의 모습은 맞는 것일까요, 틀린 것일까요? 대답은 둘 다 ‘맞다’면서 ‘아니다’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고귀함, 박완서는 안온함, 보르헤스는 지적인 상상력을 통해 각각 하나님의 나라를 그렸습니다. 그래서 이 중에 하나만을 선택해 천국을 이해할 경우 문제가 생깁니다. 이들이 말한 모든 걸로 천국을 이해해야 합니다.

[4]
신약성경에 기록된 영적 환상은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영적 환상은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한 것이지 그분의 사역이 실패했다고 매도하기 위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그분을 영광되게 하시는 일이 뭔지 우리에게 알려주겠다고 했습니다(요한복음 16:13∼14). 따라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영적 환상의 메시지는 성령님이 준 게 아닙니다. 또 영적 환상은 그걸 본 사람이 아는 그림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이걸 전문 용어로 전이해(前理解ㆍpre-understanding)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조선 시대의 사람에게는 저와 같이 짧은 머리의 사람이 환상에 메신저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랬다가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머리카락을 함부로 자른 사람이라고 “사탄아, 물러가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환상을 기록한 사람의 글을 읽을 때는 그 환상이 가진 그림의 배경이 뭔지 반드시 질문해야 합니다. 이때 성경에 나온 영적 환상의 그림을 전부 실재했던 역사적 사실로 이해하는 건 성경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지름길입니다. <4:1∼6>과 <21:16∼21>에 묘사된 천국의 모습은 구약성경을 알았던 유대인 요한이 생각한 최고의 보석들로 치장한 것입니다. 이것은 <출애굽기(대제사장과 성전, 28:17∼20)>, <이사야서(에덴동산, 54:11∼12)>, <에스겔서(새 예루살렘, 28:13)> 등에서 사용한 보석들과 같습니다.

[5]
요한은 서문인 <1∼3절>에서 책의 특징을 말했는데, 이는 고대 문서가 가진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요한은 <요한계시록>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 일은 일어났거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한 기록입니다. 이를 확장하면 성경 자체가 계시인데, 계시는 그대로 이뤄지고, 그 사실이 실재했던 역사성을 갖지 못하면 개꿈에 불과합니다. 역사적 가치에 대한 고찰이 없는 계시는 힘 없이 허공에 울리는 메아리일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주어진 계시의 결과물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이사야의 말처럼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이사야서 6:9). 하나님의 계시는 성령님의 도움과 은혜 없이 인간이 그 의미를 제대로 알기 힘듭니다(요한복음 16:8, 고린도전서 2:8∼9). 또 성경은 종말과 말세를 구분합니다(요한복음 5:24∼29). 따라서 <1절>에서 “곧 일어나야 할 일들”은 종말의 시나리오가 아니고, 말세의 역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곧”이라는 단어에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문장 구성에서 “곧”보다 더 중요한 말은 “일어나야 할”이란 구절입니다. 이 표현은 인류의 미래 역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앞으로 인류가 겪게 될 모든 일은 그 섭리에 따라 일어난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이를 가리켜 섭리신학이라고 하는데, 이는 인류 역사는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다는 믿음과 고백에 근거를 둡니다.

[6]
요한은 서두에서부터 독자가 <요한계시록>을 읽고 난 후, 이 책에서 제시한 환상을 믿고 신앙으로 이기는 사람이 되도록(로마서 12:21), 이 글을 통해 용기와 믿음, 힘을 얻도록 문학적 장치를 마련했습니다. 이는 앞부분인 <1:8>과 마지막 부분인 <21:6>에 천명된 하나님의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나는 알파(Α)며 오메가(Ω),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처음과 마지막을 하나님이 쥐고 계시는데 당신은 어떻게 해야겠습니까?’라고 요한은 박해받던 당시의 성도와 오늘의 우리에게 묻습니다. 요한은 구약성경에서부터 예언된 예수님이라는 계시의 실체를 알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요한처럼 예수님이라는 계시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2절>처럼 예수님의 제자가 돼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고, <3절>처럼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다.

[7]
<마태복음 11:27>, <누가복음 10:22> 등에 나온 복음서의 계시와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종말의 비밀에 관한 계시는 ‘하나님->예수님->최종 전달자 요한’이라는 일방통행로로 전달됐습니다.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은 이처럼 계시의 최종전달자가 요한이라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데도, 서로 자기가 계시의 최종 전달자나 해석자라고 주장합니다. 이는 <1절>을 “일어나야 할 일들” 보다 “곧”이라는 단어에 집중해서 해석했기에 벌어지는 오류입니다. <1절>은 문학적 수사 장치로 시간이 임박했다는 말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경외감을 가지고 이 책을 읽으라는 지침입니다. <1∼2절>에는 계시의 연결고리가 나옵니다. 하나님->예수님->천사->요한->하나님의 종들. 하나님은 계시를 예수님에게 직접 알리셨고, 요한에게는 천사를 통해 알리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계시를 공유하고 계신다는 의미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동일한 본질이라고 말한 유대 문학적 표현입니다. 헬라어로 계시는 ‘아포칼뤼프시스(ἀποκάλυψις)’인데 이는 ‘덮고 있는 걸 제거하거나 비밀을 폭로하는 일’입니다. 이 단어는 묵시(黙示)나 계시(啓示)로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그런데 우리말의 어감에 묵시라고 하면 약간 초월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고, 계시라고 하면 현실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에 계시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가지고 사람을 속이는 사이비ㆍ이단은 강력하게 ‘요한묵시록’이라고 주장합니다. 저들의 교리에 의하면 계시는 예수님을 통해 끝났고, 이제는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는 ‘묵시의 시대’입니다. 저들은 이런 이유로 이 책을 복음서보다 더 권위 있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성경 해석학의 기초를 흔드는 거짓말입니다.

[8]
사이비ㆍ이단의 교리와 달리 <요한계시록>은 예언과 계시의 성격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3절>에 이 책이 예언서라고 돼 있기에, 예언서로도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만약 기독교 사이비ㆍ이단의 주장처럼 이 책이 계시ㆍ묵시만 기록된 책이더라도, 이 책이 성경해석의 기본 원칙인 복음서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즉 이 책을 쓴 요한이 쓴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이 책이 넘어설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에 기록된 대로 계시ㆍ묵시는 반드시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요한복음 5:39; 16:14). 예수님이 실패했다는 식의 계시ㆍ묵시는 성경에서 허용하지 않은 허구요, 가짜입니다(요한복음 19:30). 엄밀히 따지면 예언과 계시는 같은 부분도 있지만 다른 면도 있습니다. 예언(預言)은 무교(巫敎)에서 쓰는 점사(占辭)와 달리 앞날을 미리 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말씀을 대신 전한 것입니다. 예언의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 게 <아모스서 1:1>입니다. 아모스가 계시를 본 건 <아모스서>를 기록하기 2년 전이고, 그가 <아모스서>를 쓴 건 계시를 본 때로부터 2년 후입니다. 아모스가 계시를 보자마자 책으로 쓴 게 아니라, 계시를 보고 난 후에 선지자로 사역하면서 기록한 게 <아모스서>입니다. 그래서 <아모스서>에는 아모스의 활동과 예언이 시간순으로 기록돼 있지 않습니다. 아모스가 본 계시의 순서와 상관없이 글을 쓴 시기에 민감한 사안이 필요에 따라 먼저 나옵니다. <아모스서>의 이런 구성은 <이사야서 36∼39장>에도 나타납니다. <이사야서>의 기록 순서와 달리 사건이 일어난 순서는 <38장->39장->36∼37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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