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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예배를 돌아 보셨습니까?
(창세기 4:2-7)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시며 받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배를 드린다고 무조건 받으시지 않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예배를 받으시는 반면에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두렵지만 여기에는 어쩌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예외일 수 없는것이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드린 후에 오늘 하나님께서는 나의 예배를 받으셨을까를 생각해 보신적이 있습니까?
과연 오늘 나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였는지 스스로의 예배를 돌아보신적이 있는지를 묻고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매 번 드리는 예배를 의심하거나 염려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어떤 일이든 초심을 잃지 않기위해 자신을 살펴보듯이 가끔은 익숙하게 드리는 예배일지라도, 아니 익숙하기에 더욱 더 행여 그 안에 신령과 진정함 보다는 익숙함과 편안함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봐야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각자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자였기에 땅의 소산으로, 아벨은 양치는 자이기에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에 가인은 몹시 격노하였고 그의 분노는 결국 동생 아벨을 죽이는 범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왜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의문이 첫 번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인은 어째서 분노하였으며 그의 분노와 안색의 변함이 동생을 죽이는 일에까지 이어졌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가인의 제사에 대해서 그것은 정성의 문제였다고 하는 이야기를 교회 주일학교의 경험이 있으신 분들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틀린 이야기는 아닐 수 있지만, 그렇다면 여기서 도대체 정성은 어떻게 구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고, 제물에 대한 아벨과 가인의 정성은 어떻게 차이가 있었는지 궁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좀 더 신학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제사에 필요한 제물 곧, 제사의 방식에 원인이 있었다고 언급하기도 합니다.
당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고 받으시는 제사는 피의 제사이며 더구나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기에 이것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아벨은 순종의 제사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고, 하나님은 아벨이 드린 제물을 합당히 여기시고 열납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역시 맞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 그들의 제사가 정성과 순종에 관련 된 것일 지라도 아마 이것은 하나의 추측일 뿐 하나님이 왜 아벨이 드린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받지 않으셨는지에 대한 정확한 답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와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오늘 본문을 통해 그 정확한 이유를 찾자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위에서 언급한 바 대로 우리의 예배를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 내용을 보자면,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지만,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말씀을 보자면, 하나님은 아벨과 아벨이 드린 제물을 받으신 반면에 가인과 가인이 드린 제물은 받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단순히 제물만 받고 안받으심이 아니라 그것을 드린 사람과 함께 받으시고 받지 않으셨습니다.
예배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예배는 우리가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 함께 들어가 제물과 함께 우리 자신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최상의 제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거기에 나를 드림이 빠져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예배가 될 수 없습니다.
온전한 예배는 곧 내가 드릴 순종과 정성의 제물과 함께 내 스스로가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우리가 드리는 무엇인가를 받아가시는 분이 아니라 그 예배 가운데 우리의 순종과 정성, 마음과 육신 그리고 영혼까지 열납하시며 이것을 신령과 진정의 예배라고 하십니다.
만일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정성껏 준비한 졔물은 드리지만, 여러분 스스로를 함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면 과연 그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셨을까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예배는 그 안에 성령 안에서 자유함이 있지만, 결코 방종함으로는 드려질 수 없습니다.
이에 시편 기자는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하리이다" (시 5:7 KRV)
여기서 주를 경외함으로 경배한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주를 두려워함으로 경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는 주님이 두렵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행여 자신의 예배가 주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할까 두려운 마음으로 예배자로서 자신을 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예배는 스스로의 의로움이 아닌 오직 주의 풍성한 인자를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지만, 주를 경외함으로 그 거룩하심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물만 거부하신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린 가인도 함께 받지 않으셨습니다.
가인은 자신이 드리는 제물만 보았을지라도 하나님은 가인이 드리는 제물과 함께 가인을 보셨습니다.
따라서 무슨 이유였는지는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여기서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은 제물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가인 스스로에게 더 큰 원인이 있었기에 하나님은 가인과 그가 드린 제물을 함께 열납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인은 자신이 드린 제물도 그리고 자신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심에 심히 분노하며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한 번 가정해봅시다.
어느 집회에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가서 예배드렸는데, 별로 은혜받지 못 한 것 같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같이 참석한 주변 사람들은 은혜받고 심지어 응답까지 받는데, 나만 밋밋하고 응답도 없는 것 같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 만나주시는 것 같은데 나만 동떨어진 듯 한 느낌일 때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 서운하십니까?
하나님을 향한 의심과 원망의 마음이 생깁니까?
옆에서 모든 은혜는 혼자 다 받고있는 사람을 보면서 왜 나에게는 은혜도 없고 응답도 없는지 내가 무엇을 잘 못 한 것인지 괴로우십니까?
혼자 은혜받는 것 같은 사람이 부러우면서도 괜히 얄밉게 느껴지지는 않습니까?
가인 역시 아벨과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심히 분해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벨을 보며 안색이 변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보십시오.
하나님은 지금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지만, 앞으로도 계속해서 가인과 가인의 제물은 받지 않으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가인은 원래 악인이라서 가인이 드리는 것은 무엇이든 받지 않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만일 가인이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드린다면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예배를 언제든 기쁘게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기위해서 우선 가인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보다 더 풍요롭고 고급스러운 최고의 제물이 아닙니다.
예배를 향한 뜨거운 열정과 그 어느 곳 보다 잘 갖추어지고 준비 된 최상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진심어린 회개입니다.
나의 예배를 받지 않으심에 대한 서운함, 나에게만 은혜 주시지 않는 것 같음에 대한 원망과 불평이 아니라 오직 회개함으로 먼저 무릎꿇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분하여함을 멈추고 회개하지 않으면 은혜의 자리에서도 안색이 변할 뿐 아니라 죄가 문에 엎드리도록 방치하는 과오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럼에도 가인은 선을 행하여 낯을 들기 위한 회개의 문을 연 것이 아니라 분하여 안색이 변함으로 죄가 문에 엎드리도록 만들었습니다.
예배의 현장에서 아벨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 거하였지만, 가인은 예배의 현장에서 죄가 문을 열고 들어오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는 다스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죄를 다스릴 권한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가인이 분하여함을 멈추고 선을 행함으로 또 회개함으로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우리도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 입어 죄를 다스리고 문 앞에 엎드린 죄라 할지라도 회개를 통해 죄의 소원 곧 죄의 욕망을 통제할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다스리는 것이지 결코 죄의 다스림을 받는 길을 택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가인은 회개의 기회를 버렸습니다.
선을 행함으로 낯을 들 수 있는 길을 버리고, 죄를 다스릴 수 있는 권한 마저 포기하고 문 앞에 엎드린 죄에게 자신을 내어 주었습니다.
죄가 자신을 다스리도록 만들었습니다.
분하여함과 안색의 변함을 포기하지 않음으로...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인이 이렇게 된 것은 예배로 인함입니까?
예배 한 번 잘 못 드렸다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이겠습니까?
그래서 예배를 부담스러워하고, 어려워하고 두려워하라는 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가인의 악한 행위가 그의 선하지 못 함이 예배를 통해 드러난 것입니다.
만일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면 가인은 평생 악함을 가지고 그렇지 않은 듯 살았을 것입니다.
마치 경건의 능력은 없으면서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사는 것 처럼...
아벨과 그의 제물을 열납하심은 아벨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당시 가인과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심 역시 가인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인이 계속해서 악함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회개함으로 하나님이 받으실 예배를 다시 드릴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은혜입니다.
따라서 가인은 이 때 분함과 안색이 변함으로 일관할 것이 아니라 회개함으로 선을 행하여 낯을 들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했습니다.
그래야 죄를 다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가인은 은혜를 은혜로 깨닫지 못 했습니다.
그의 분함과 안색이 변함은, 회개의 기회를 주심에 각별한 주님의 은혜이자 문 앞에 엎드리는 죄를 다스릴 능력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은혜와 동떨어진 예배는 없습니다.
다만 자신이 스스로 은혜에 대해서 왜곡하여 받아 드리고자 함에 오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심도, 또는 받지 않으심도 나를 향한 은혜입니다.
만일 받지 않으시는 예배라면 거기서 절망하고 좌절하여 안색이 변할 것이 아니라 다시 돌이킴으로 회개하여 죄를 다스리는 예배자로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는 어쩌다 한 번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날마다, 언제나, 영원히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입니다.
자신의 예배에 간혹 실수가 있을 지라도, 분하여 안색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여 낯을 들고 다시금 신령과 진정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실한 예배자로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창세기 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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