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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6-20 05:00

말씀의빛교회 윤용 목사.(사진제공=말씀의빛교회)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의 의미]

(사무엘상 26:13-25)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고전 4:2)
이라고 성경이 말하는데,
충성이 무엇일까?
무엇에 충성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충성일까?

다윗과 아브넬과 사울의 역학 관계를 통해
'충성'에 대해 묵상한다.

1. 다윗의 충성

다윗은 어렸을 때는 맹수들과 싸우며
양치는 일에 충성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직무였기 때문이다.

양을 지키게 위해 몸에 익힌 실력으로
목숨 걸고 골리앗과 싸워 이겼다.
이스라엘을 향한 충성이었고
이스라엘의 왕인 사울을 향한 충성이었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었다.

사울에게 충성하기 위해
블레셋 군인 200명의 포피도 베어서 바쳤고,
악신이 들린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며 곁을 지켰다.

그런데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 했고
다윗은 충성했다는 이유 때문에
처절한 도망자 신세가 되고 말았으니
이제 다윗은 누구에게 순종해야 했을까?

사실 다윗의 충성의 대상은 바뀐 적이 없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께 충성했다.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사울에게 충성했을 뿐이었다.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나
다윗의 충성의 대상은 여전히 하나님이었다.
그럼 사울에게는 이제 더이상 충성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었을까?

다윗은 그런 상황에서도 사울을 향한 충성의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두 번이나 찾아왔음에도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은 것이 
다윗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사울을 향한 최선의 충성이었다. 

사울에게 목숨의 위협을 느꼈으나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울을 직접 죽이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향해서와 사울을 향해서
참된 충성의 자세를 끝까지 지킨 다윗이다.

2. 사울

왕인 사울은 누구에게 충성해야 했을까?
왕도 충성해야 하는 절대적인 대상이 있다.
하나님께 충성해야 했고 왕이라는 직무에 충성해야 했다.

사실 왕이라는 직책은 책임이 너무 무거워서
온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님과 자신의 직무에 다 쏟아도
시간도 에너지고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한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어간다는 것이
결코 쉽거나 가벼울 수 없기 때문에
우선 하나님께 충성해서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했다. 

그럼에도 사울은 하나님께 충성하거나
왕이라는 책무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욕과 시기와 질투에 충성했다.

권력욕, 욕망, 탐욕, 질투 등에 충성하면
하나님도 보이지 않고 백성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직무의 책임도 보이지 않음을,
그래서 지극히 비상식적인 삶을 살다 망할 수밖에 없음을
사울의 삶이 명백하게 보여준다.

하나님과 주어진 직무에 충성할지,
아니면 자신의 욕망에 충성할지 중에서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3. . 아브넬

다윗이 사울의 창과 물병을 몰래 가져온 후에
멀리 서서 아브넬에게 호통쳤다.

<삼상 26:16, 새번역> "너는 이번에 너의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말하지만, 너희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너희의 상전을 보호해 드리지 못했으니, 너희는 이제 죽어 마땅하다. 그러므로 너는 이제 왕의 창이 어디로 갔으며, 왕의 머리맡에 있던 물병이 어디로 갔는지, 어서 찾아 보도록 하여라."

아브넬은 누구에게 충성해야 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왕인 사울에게 충성해야 했다.
사울의 군대장관이었으니 그가 해야 할 기본적인 책무는
사울의 목숨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 일을 소홀히 했으니 아브넬은 책망받아 마땅했다.

그런데 아브넬의 충성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브넬에 사울이 원하는 대로 사울에게 충성하면
무죄한 다윗을 죽여야 했다.

그럴 경우 아브넬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
물론 아브넬은 가장 기본적인 충성인
사울을 지키는 것조차 소홀히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아브넬의 입장이라면,
즉 악한 리더를 섬기는 입장이라면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충성하는 것인지를 
신자라면 꼭 생각해야 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생각보다 많기 때문이다.

아브넬도 사울에게 충성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충성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 충성하기 위해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사울에게 충성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사울에게 충성하기 위해 불의를 행해야 한다면,
사울에게 충성하려면 악을 행해야 하고 
무죄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다.

그럴 경우에도 무턱대고 사울에게 충성하면 될까?
리더가 악하고 시스템이 악할 때에도 
무턱대고 악한 리더와 악한 시스템에 순종하고 충성하면 될까?

그럴 리가 없다.
아브넬은 선택해야 했다.
악한 리더인 사울의 밑에 있으면서도
지혜롭게 악을 피하고 선을 선택하면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든지,

아무리 생각하고 시도해도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사울에게서 도망쳐 나와서 다윗에게로 가야 했다.

왕에게 충성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없이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4. 본질

다윗이든 사울이든 아브넬이든 관계 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충성해야 한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그 본질 위에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신의 위치에서 
충성해야 할 대상을 찾아서 올바르게 충성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어떤 다른 대상을 향한 충성도 해서는 안 된다.

아돌프 아이히만 이라는 나치 독일 장교가 있었다.
홀로코스트 실무책임자라는 자신의 직무에 충성해서 
수많은 유태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 선 인물이었다.

그가 이스라엘의 재판정에서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자신은 권한이 거의 없는 '배달부'에 불과했다.
상급자의 지시에 따라 성실히 임무를 수행했을 뿐"

무엇에 충성해야 할지 생각해야 하고 
지금 자신이 무엇에 충성하고 있는지 판단해야 한다.

교인이 범할 수 있는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 
목사의 말에 무조건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이다.

목사 즉 '주의 종'에게 순종하고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이히만이 범한 죄와 비슷할 수 있고
아브넬이 범한 죄와 비슷할 수 있다.

목사가 하나님의 뜻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충성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목사도 한 사람의 죄인이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음을 알아야 하고 
그렇기에 교인은 목사에게 충성해서는 안 된다.

목사의 말이 성경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지 맞지 않는지
교인이라면 반드시 분별해 보아야 한다.

성경을 기준으로 분별해서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면
목사의 말에 순종하고 충성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목사의 의견에 대해
목사에게 이견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서 함께 의논하고 토론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이 
교회에는 꼭 필요하다.

목사도 교인도 가장 우선적으로는 
하나님께 충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사도 성도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분별하는 일이다.

목사도 성도도 성경을 멀리한다면
악에 충성하고 죄에 충성하고 
자신의 욕망에 충성하고 잘못된 목사의 탐욕에 충성하다가 
하나님께는 불충하게 되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말 것이다.

5. 나는?

'충성'이라는 단어가 불편했다.
'하나님께 충성'하라고 말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교회 일에 충성하라는 말이었고,
목사의 말에 충성하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최선을 다해 교회에서 맡은 직무에 충성했고 
최선을 다해 목사님의 말에도 충성했지만
왠지 모를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다가 그 불편이 커져서 혼란에 빠지는 경우도 생겼다.
목사가 합리적이지 것을 시켰는데,
조금 더 합리적으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가 
교만하다고 엄청 책망을 받은 것이다.

그게 교만인지 참으로 많이 고민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교만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합리적이지 않은 것을 시킬 수는 있으나,
합리적인 제안을 했을 때 그 제안에 대해 생각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충성을 강요하고 제안한 사람을 교만하다고 몰아 부친다면
그렇게 하는 목사가 교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경험을 통해서 '충성'에 대해서 
참으로 오랫동안 고민했다.
도대체 누구에게, 무엇에 충성해야 
신자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인지 너무 궁금했다.

책도 읽고 기도도 했지만 속 시원한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후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내 삶이 아프고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신자답지 못한 나의 삶의 모습에
처절하게 절망하기 시작했다.
말씀을 스스로 묵상하지 않고서는 
일상 속에서의 답답함을 해소할 수가 없었다.

말씀을 치열하게 묵상하기 시작했다.
살기 위해서였다.
교회 생활과 일상 생활의 괴리가 나를 괴롭혔는데
스스로 말씀을 묵상하면서 아주 조금씩
일상에서 신자로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실천해 갈 수 있었다.

무지 힘들었지만 아주 조금씩
말씀의 능력을 경험해 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신자가 충성해야 할 대상이 '하나님'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충성하려면 
눈에 보이는 그리고 읽을 수 있고 묵상할 수 있는
성경에 충성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우선은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에 '충성'했다.
성경을 실천하는 것에 충성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성경도 모르고 성경의 의미도 모르면서 
성경에 충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제법 오랜 세월 동안 
말씀을 묵상하는 것에 충성하면서 
내 삶의 색깔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
가장 큰 변화는 '우울'함이 주된 정서였던 내면이
밝아졌고 행복해졌고 기쁨이 많은 정서로 변한 것이다.

그리고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음을
온 삶으로 느끼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나에게 기적 같다.

나같이 찌질한 사람도 이런 변화가 가능한데
다른 사람이라면 오죽할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말씀을 묵상하는 삶을 전하고 싶고 도전하고 싶었다.

평신도로서 말씀 묵상 세미나를 했고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는 사람에게
말씀 묵상이 얼마나 좋은지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말씀의 인도를 따라 목사가 되었다.
말씀 사역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였다.

지금 섬기는 말씀의빛교회와 
온라인 묵상 나눔방에서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다.
나와 성도들이 오직 말씀 하나에 삶을 걸도록
격려하고 나누고 훈련하는 것이다. 

앞으로 다른 방향으로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일의 목적은 분명할 것이다.
'말씀에 삶을 거는 성도를 세우는 것'이다.

말씀에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요,
말씀에 충성함으로 하나님께 충성하면 
그 삶이 반드시 좋아질 것을 나는 믿는다.

나의 남은 삶도 오직 말씀의 사람이 되고 
말씀의 사람을 세우는 것에 나의 모든 힘과 에너지를 
행복하게 쏟으며 살아가려 한다.
주께서 긍휼히 여기시고 도우시길 기도하는 아침이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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