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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 성도가 부를 새 노래(요한계시록 13:18∼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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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은 <13:18>에 사용된 짐승을 상징하는 숫자이자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 숫자인 “666”에서 히브리어식 표현법인 게마트리아(gematria)를 사용했습니다. 유대인은 아라비아 숫자를 몰랐기에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숫자를 대신해서 표기했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싶을 때는 숫자로 이름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걸 게마트리아라고 합니다. 이런 표현법은 <요한계시록>뿐만 아니라 <마태복음>에도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온 예수님의 족보가 서로 다른데, <마태복음>에는 사람이 빠져있습니다. 마태는 일부러 예수님의 족보를 14의 배수로 정리했는데(마태복음 1:17), 14라는 숫자가 게마트리아입니다. 14를 히브리어로 풀면 다윗입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임을 강조하기 위해(마태복음 1:1) 그분의 족보를 쓰면서 이걸 사용했습니다.
[2]
로마 황제였던 네론 카이사르(Neron Kaisar)를 히브리어로 쓴 후 게마트리아로 풀어 철자를 합하면 666입니다. 그런데 <새번역성경> 각주에 나와 있듯이 신약성경 고대 사본에는 616으로 기록된 게 있습니다. 게마트리아로 616은 ‘네로 카이사르’고, 666은 ‘네론 카이사르’입니다. 또 로마제국을 의미하는 ‘라테이노스’도 게마트리아로 666입니다. 성경사본학에 따르면 <요한계시록>에 나온 666과 616은 같은 의미이기에 이걸 네로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616은 바코드나 베리 칩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이걸 바코드나 베리 칩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초기교회 교부 이레니우스는《이단을 반박함》이란 책에서 <이사야서ㆍ예레미야서ㆍ다니엘서>의 예언에 대해 다뤘고, 이 책들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666이 누군지는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3]
우리가 “666”을 네로 한 사람으로만 생각하고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네로를 모델로 사람이 가진 숫자의 한계를 언급하며 이게 어떤 사람을 가리킨다고 했습니다(13:18). 그렇다면 “666”의 첫 모델은 네로였지만, 이후 자신을 인신(人神)으로 추켜세우며 인간의 숭배를 받으려고 했던 로마의 모든 황제가 “666”에 해당합니다. 또 초대ㆍ초기교회 시대 이후 인간이면서 자신을 신의 위치에 올려놓고, 사람들의 추앙을 받으며 살았던 사람들과 저들의 추종세력이 “666”입니다. 그런 면에서 일본 제국주의 시대에는 일본의 천황이 “666”이었고, 북한의 김일성ㆍ김정일 부자가 “666”입니다. 그리고 현재는 우리 곁에서 예수님의 모습으로 분장한 채로 용의 목소리를 내는(13:11)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이 “666”입니다.
[4]
<14장>은 시온산으로 피한 하나님의 백성을 보여줍니다. 초대ㆍ초기교회의 성도에게는 시온산이란 피난처가 있었습니다(14:1). 원래 시온산은 하나님의 성전이 세워진 산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를 의미했습니다. 이 산은 아주 높고 안전한 천연의 요새였기에 적은 병력으로도 얼마든지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지형보다 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 산이 각인됐던 건 이곳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주님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기 위해 앉아 계시는 상징적인 보좌가 이곳에 있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세상이 아무리 요란하고 혼란에 빠져도 시온산은 안전할 것으로 생각했고, 요한은 이런 이미지를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임재하셔서 주님의 백성을 가르치고 지켜주시는, 이스라엘 백성이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영원한 도성에 어린양과 144,000명의 백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문장을 <새번역성경>은 문맥을 고려해 “또 내가 보니”라고 번역했지만, 헬라어로 읽으면 “그리고 보라!”라는 감탄사입니다. 그가 아주 놀라운 걸 봤다면서 감탄에 겨워 쓴 내용이 <14장>입니다.
[5]
<14장>의 전체 문맥인 <12∼14장>은 공통점을 가진 하나의 단위를 형성하며 <10:1∼11:13>과 연결고리를 형성합니다. 그리고 <12∼14장>은 <11:3∼13>에 나타난 악의 세력과 복음을 증언한 교회 사이에서 일어난 충돌을 확대해서 보여줍니다. 이런 이유로 <11∼14장>에 나온 ‘여자, 여자의 아들, 용, 바다와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두 마리, 짐승의 표 666(혹은 616)’ 등은 모두 교회와 관련 있습니다. 요한은 <11:3∼13>과 <12∼14장>을 <11:2∼3; 12:6ㆍ14; 13:5>에 나온 ‘42달, 1,260일, 한 때ㆍ두 때ㆍ반 때’라는 기간을 통해 연결했습니다. 이 셋이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같은 실체를 말하기 위해 연결된 암호입니다. 군대에서는 암호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암호를 모르면 우리 편도 적군으로 오해하고 서로 싸우게 됩니다. 이처럼 <요한계시록>의 암호를 모르면 이 책을 엉뚱하게 해석하게 됩니다. 그는 같은 기간을 문맥에 따라 다르게 썼지만, 이 표현이 서로 같은 실체를 지향하도록 구성해서 <11∼14장>을 기록했습니다.
[6]
<12∼13장>의 3중적 구분은 <12∼14장>을 <11장>과 뒤로 연결하고, 이어서 나타나는 <7절>의 4중적 구분은 <12∼14장>을 <15∼16장>과 앞으로 연결합니다. <14장>은 나팔심판 사이에 있는 삽입구와 <12∼13장>을 포함한 <12∼14장>을 연결한 매개체고, 이후에 기록된 마지막 대접심판과 <12∼14장>을 연결한 고리입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14장>은 이 책의 몸통 안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확보하고 있으면서, 몸통 안의 서로 다른 장기(臟器)들을 연결하는 교량 또는 교집합의 고리입니다. 이걸 인체로 비유하면 몸 안의 모든 장기를 서로 연결하는 피나 혈관이 <14장>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14장>을 <12∼13장>에서 보였던 암울한 이야기와 달리 신선하고 밝은 분위기로 표현했습니다. 어린양을 따르던 성도가 승리했고 짐승의 추종자들은 저들의 행위에 해당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런 표현을 통해 <13장>에 나온 짐승의 표를 거부한 성도와 짐승들을 따랐던 저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답을 제공했습니다.
[7]
<1∼5절>은 <7장>에 나온 ‘도장을 맞은 사람 144,000명’에 관한 이야기를 다룰 때 자세히 나왔던 내용으로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합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땅은 사탄의 통치가 허락된 곳입니다(13:8ㆍ14). 이런 환경에서 이들이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란 건(3절), 성도가 땅에서 살고 있지만, 하늘나라에 속한 사람들이 됐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하늘의 시온산에서 어린양과 함께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1절). 그리고 이들은 그들만 배워서 부를 수 있는 새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런 모습은 <12:18>에서 여자의 자손들과 싸우려고 바닷가의 모래 위에 서 있었던 용의 모습과 대조를 이룹니다. 용은 끊임없이 출렁이는 파도 앞 모래 위에 서 있었습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흔들리지 않고 영원하게 굳건히 있는 시온산의 어린양과 그분을 따르는 무리인 여자의 자손들이 있었습니다.
[8]
요한이 환상 중에 봤던 시온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는 구약성경의 예언이 신약성경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이 예언은 예수님이 세운 교회의 시대를 기점으로 이미 성취됐습니다(사도행전 2:16∼31; 13:33, 히브리서 1:1∼5). 그러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이걸 현대의 예루살렘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재림하는 날 예루살렘까지 가야 한다고 합니다. 이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자(Back to Jerusalem)’라는 표어가 나온 배경입니다. 그런데 이런 해석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성의 여인에게 더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고(요한복음 4:24), 그분의 몸을 성전이라고 했습니다(요한복음 2:21).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 볼 때 <14장>의 시온산은 구체적인 지명이 아니라 신약시대의 교회와 하늘나라에 대한 상징적인 지명을 통칭한 것입니다. 인류 구원의 모든 게 완성되는 날,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도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요한계시록>이 보여준 것처럼, 하늘나라에 있는 예루살렘이 땅으로 내려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21:2, 히브리서 12:22).
[9]
기독교의 구원은 해 아래 세상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 아래 세상을 완전히 떠나는 게 아니라, 이 땅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위에서부터 이 땅으로 강림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말씀한 주기도문에 나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주기도문을 통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배웁니다. <요한계시록>을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해석하든 구원을 위해 이 세상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은 성경에서 말한 구원과 격(格)이 다릅니다. 이 땅에서 이뤄지고 있는 구원이지만, 세상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반드시 강림해야 합니다. 이런 절차를 무시하고 여전히 강림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다 완결됐다고 말하는 사이비ㆍ이단들의 주장은 성경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했지만 지금도 강림하고 있고, 예수님이 재림해야 이 사건이 완성됩니다. 그래서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이 필요한 것이고, 이 땅에 강림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기에 성령님의 인도를 따르는 사람이 아름다운 것입니다(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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