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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11-27 13:17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다니엘서 8:13∼14; 9:24∼27; 12:11∼12)

[1]
우리 뇌(腦)가 하는 ‘착한 거짓말’ 중 하나가 인간이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걸 잊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사람ㆍ사건ㆍ기회 등 뭔가를 끊임없이 기다리며 삽니다.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기다리지 않고 살려면 자족해 스스로 모든 걸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완벽체(完璧體)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기다려야 할 사람ㆍ시간ㆍ때ㆍ기회를 정확하게,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끝까지 기다리지 못하면 오히려 그것으로 인해 역풍을 맞습니다. 또 성경에서 말씀한 방법을 배운 후 그것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야 삶에 높은 파도가 몰아쳐도 흔들릴지언정 넘어지거나 엎어지지 않고, 큰 파도 너머에 있는 희망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2]
기독교는 기다림의 종교입니다. 해 아래 세상이 완전한 세상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주도하시는 회복을 기다리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회복이 예수님의 강림으로 완성되기에 그날을 기다리는 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이 세상을 마침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에게 이 세상은 실체이면서도, 예수님의 강림을 준비하는 곳이란 이중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佛敎)나 유교(儒敎)는 초월적 세계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각해서 부처가 되는 게 불교가 추구하는 종착지기에, 불교는 부처가 되기 위해 속세를 떠나는 출가를 권합니다. 유교는 공자가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는가(未知生焉知死)”라고 했기에 해 아래 세상에서 구현되는 완성을 추구하고, 이런 사고로 인해 정치 현장을 군자가 수도하는 장으로 삼습니다.

[3]
그런데 크리스천처럼 뭔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속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주신 비전이 없으면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기 힘듭니다. 또 ○○ 형제가 의무복무를 위해 입대했지만, 벌써 그의 제대를 기다리듯 성령님이 준 소망이 깃든 기다림은 삶에 활력소가 됩니다. 만약 기독교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이란 재림 교리를 포기하거나, 이 기다림 앞에서 신앙을 성찰하는 훈련을 게을리하면, 그때부터는 신앙의 빛이 흐려집니다. 크리스천은 오늘도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사람이기에, 이 기다림을 잊거나 인간의 셈법으로 계산하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 대강절이 중요한 건 크리스천이 누구를 기다리는 존재인지 일깨워주기 때문입니다. 

[4]
사이비ㆍ이단 중에는 예수님이 이미 재림하셨다고 주장하면서, 그 날짜를 계시로 새롭게 받았다고 저들끼리 지정해 교리로 채택한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실제로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저들도 예수님의 강림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주장은 성경에서 말한 게 아니고 저들의 입맛에 맞춰 성경을 난도질한 후, 파편을 꿰어 걸망태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저들은 농사짓는 데 쓰는 걸망태를 만들어 놓고 그걸 명품 핸드백이니 가지고 다니라고 합니다. 

[5]
성경에서 말한 예수님의 강림에 관한 말씀을 보면 이 사건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라고 온 세상에 선포하는 일이고, 인간의 죄 용서와 아무런 상관도 없이 일어나는 일입니다(히브리서 9:28). 또 부활하신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는 심판ㆍ회복이 개별로 일어나지 않고 한꺼번에 같이 일어납니다(요한복음 14:26, 고린도전서 15:52). 해 아래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방식처럼 개별 접촉을 통해 비가시적으로 믿음의 진보를 이뤄내는 건 성령님의 역사 방법이고, 예수님의 강림은 가시적으로 이뤄지기에 이와 다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강림이 이미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사이비ㆍ이단의 교리에는 이런 게 없습니다. 저들의 교리를 보면 회복이 공적에 따라 개인별로 일어나고, 이로 인해 교주들이나 저들의 측근만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6]
구약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강림을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기에 초림ㆍ재림ㆍ삼림과 같은 표현이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림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이고, 신약성경 곳곳에 그분이 다시 오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다시, 두 번’을 뜻하는 재(再) 자를 써서 재림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재림’이란 말을 쓰자 자연스레 ‘초림’이란 말이 만들어졌습니다. 원래는 ‘예수님의 탄생’을 뜻하는 말인데 이게 초림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걸 사이비ㆍ이단들이 저들의 교주를 재림주라고 부르기 위해 많이 썼습니다. ‘초림주와 재림주’라고 하면 대비가 되지만,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주라고 하면 앞뒤가 연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이 자기들을 재림주라고 하고, 예수님을 초림주라고 하면서 그분을 격하시키는 어투로 이 단어를 썼습니다.

[7]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란 말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전해 내려온 교회의 간절한 기도입니다(고린도전서 16:22). 따라서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건 신비주의에 빠진 잘못된 신앙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기도를 사이비ㆍ이단들에 많이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강림보다 ‘그냥 이대로 있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건 성경에서 말한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닙니다. 또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이나 저들의 추종자들은 절대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기에, 만약 크리스천이 저렇게 기도하면 정통 기독교와 사이비ㆍ이단의 경계가 흐려집니다. 사이비ㆍ이단은 삶의 주인이 자기들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예수님이 성경의 말씀대로 강림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주인이 예수님인데 저들처럼 주인이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 건, 자신이 주인이 돼 ‘나여, 나여’, ‘내 것이야, 내 것이야’라고 외치는 것과 같습니다. 내게 주어진 삶일지라도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그러니 크리스천은 ‘나여, 나여’가 아니라 ‘주여, 주여’하면서 끝까지 주인인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8]
바울이 <데살로니가후서 3:6∼15>에서 말씀했지만, 환상에 빠져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세상의 모든 삶을 포기하는 건 성경의 가르침과 다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위험한 건 부활하신 예수님의 강림이 아예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반드시 있습니다. 이건 성경의 가르침이자, 보혜사 성령님의 약속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고 한 건 그분이 직접 말씀한 것이고(요한복음 14:3), 초대교회에서부터 성령님의 은혜 속에 모든 세대를 통해 전해 오는 약속입니다.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그분이 한 말씀을 생각나게 해서(요한복음 14:26) 그분의 말씀을 지키도록 우리를 인도하며, 그분의 강림을 준비하도록 교회를 이끕니다. 

[9]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린다는 건 산에 들어가 기도하면서 그분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그분이 와서 하실 일을 내가 하지 않고 비워두는 것입니다. 주인이 따로 있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와서 할 일을 성령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일을 하기 위해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그분의 강림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강림하실 것이란 재림 교리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소설과 같은 이야기로라고 합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인 것처럼 살고 있는데, 갑자기 진짜 주인인 예수님이 나타나서 ‘네가 주인이 아니라 내가 주인이다’라고 하니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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