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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 작은 친절의 기적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Pittsburgh)의 한 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지난 주일, 저녁 예배를 마칠 때쯤였을까. 저는 늘 하던 대로 강단에서 내려와 성도님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처음 출석을 하신 분들을 환영하기 위해 예배당 출입문 쪽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별안간 전혀 생면부지의 한 젊은이가 나타나더니 제 손을 꼭 잡고 너무도 깍듯이 인사를 하길래,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름이 무엇이며 사시는 곳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는 매우 부드러운 어조로 자신의 이름을 존 사일러스라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이 사는 곳은 여기서 상당히 먼 타 지역의 도시이며, 그곳에 있는 어느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며 아주 상세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이 먼 곳까지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오래전의 일을 떠올리며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오랫동안 저를 찾아 헤매다가 1년 전 독일에서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상당히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는 여전히 생면부지의 청년일 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오래전 어느날 밤, 우연히도 어느 전도 집회에 참석했다가 제가 선포하는 설교를 듣게 되었고, 집회가 끝나고 성도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던 제가 자신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며 진심으로 반갑다는 인사와 더불어 아주 따뜻하고 친절하게 환영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그 누구라도 친절을 베풀며 반갑게 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전혀 이상할 것도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그는 그때 아주 작은 저의 친절에 감격했다며, 그 후 나를 뵙기 위해 찾아다녔다는 것이다. 옷깃으로 스치는 인연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렇다고 찾아 헤맬 정도의 인연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다.
특히 이런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던 성도님들이 더 크게 감동을 받았다며 흥분했다. 나는 이번 사례를 통해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도 친절과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한가를 새삼 느꼈고, 여느 때보다도 깊은 사고(思考)와 사색(思索)에 젖게 만들었다."라는 내용이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자는 공통적으로 서두 부분에서 초 긴장 상태에 몰입하여 어떤 심플한 사건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데 끝까지 다 읽어도 그저 누구에게나 대하듯 친절한 얼굴로 손 한 번 잡아 준 것 밖에는 없다. 아마도 그날 위 이야기 속의 목사님께서 일일이 잡아 준 손은 집회 참석자 모두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유달리 그때의 친절한 모습에 감동을 하고 감격을 하여 두고두고 잊지 못해 수소문까지 해가며 목사님의 동정(動靜)을 오랫동안 추적하여 좇아온 사람은 오직 그 청년 한 사람이었다. 감격의 사례는 평범한 일상에서 지극히 평범하고 흔한 것이었지만 그 흔한 상황을 특별하게 만든 청년의 경우는 희귀에 가깝다.
본 필자가 매일 같이 아침의 말씀 묵상 편지와 월요 목양 칼럼과 토요 연주 찬양을 상당한 시간을 투자하여 작성하고 띄워 보내면서 추구하는 희망은, "받고 읽고 듣는 자가 죄다 깊은 은혜의 강가로 나아가 날마다 영적 성숙과 사역의 현장에서 지사충성의 체험들을 쌓아 가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나름의 기대치에 있다.
하지만 "죄다"라는 추구의 대상 목표는 오롯이 필자의 바람이고 기대겠지만 실제로 매일같이 받는 자의 입장에서는 귀찮을 수도 있고, 부담일 수도 있고, 전혀 무가치한 시간 낭비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사실은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아예 처음 첫마디부터 마음을 닫아버릴 수도 있을 가능성도 마찬가지다.
다만 눈도장 한 번 찍을 때, 한 마디 뇌리에 스쳐 준다면 하는 바람이 있기에 수취인의 원치 않는, 곧 수취인에게는 의사를 묻지 않은 실로 무례한 행위임을 알면서도 보낸다. 복음 전파자의 전도 행위가 환영받는 곳은 없지만 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의 회심을 기대함이 과연 지나친 욕심일까?
천하보다도 더 귀한 불신 영혼이 구원의 반열에 들어와 천국 시민권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이 땅에 전도자들의 발걸음은 힘차고 당당할 것이다. 위 이야기 속의 한 청년처럼 목사님의 악수 한 번에 감동을 받고 감격을 하게 된 실로 기적 같은 사례가 일어날 수 있는 개연성을 누가 부정하겠는가?
오늘은 특이한 상황이나 사례가 아니면서도 아주 희귀한 긍정 사례를 기적같이 일구어낼 수 있다는 생애의 여지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는 교훈 하나 진지하게 심장에 새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버릴 것이 아니라면 언젠가는 진귀하게 쓸모 있을 것이라는 전제 하나 붙들고 가자!
본 필자는 길을 가다가 나사못 같은 것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주워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가 공구 박스의 나사못 통에 합류시키는 버릇이 있다. 지나는 차량들의 타이어 펑크를 미연에 예방하거나 어린아이들의 안전을 생각한 버릇이긴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모아둔 것들이 언젠가는 꼭 쓸모가 있었기에 그러고 있다.
버려진 한 개의 작은 나사못처럼, 그 쓰임새를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자신의 존재감을 어필할 수 있다면 지극히 큰 것에까지 확장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이 어필될 수 있지 않겠는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 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눅 16:10)라고 하신 것처럼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요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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