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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죄의 불감증'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3-04-30 10:27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죄의 불감증 ♧

     팔월 대보름날 고개를 넘어 큰집에 다니러 가는 부자(父子)가 있었다. 아들은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으나 아버지는 불신자였다. 그런데 길 가던 도중에 아버지가 목이 마르다며 아들에게 "얘야, 갈증이 많이 나는구나. 마침 저기 무밭이 있으니 무 한 개만 뽑아 먹어야겠다. 너는 여기서 누가 오는지 망을 잘 보거라"

    아버지는 아들의 대답도 듣지 않고는 바삐 무밭으로 들어갔다. 마침 다리통 만한 무를 발견하고 막 뽑으려는 찰나에 갑자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깜짝 놀라며 '아이코 큰일 났구나' 싶어 밭머리로 신속하게 나와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이놈아 아무도 보는 이가 없지않으냐? 남자는 간이 커야지. 똑똑히 지켜!" 하고는 다시 무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이번에도 막 무우를 뽑으려는데 아들이 "아버지 누가 봐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급히 뛰어나온 아버지는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조금 화가 난 얼굴로 "도대체 누가 보더냐?"라고 다그치자 아들이 "하늘과 별이 그리고 저기 보름달이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아버지는 턱없는 아들의 말에 짜증 난 말투로 "이놈아 똑똑히 지켜!"라고 윽박지르고는 다시 무밭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도 막 무를 뽑으려는데, 아들이 다소 다급한 목소리로 "아버지 진짜 누가 보고 있어요."라고 했다.

    놀란 아버지는 헐레벌떡 뛰어나와 "누구냐?" 숨찬 목소리로 아들에게 힐문했다. 그러자 아들이 "하나님이 내려다보고 계시잖아요?"라고 하며 오히려 아들이 불편한 듯한 태도로 아버지를 나무라듯 대답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너무도 진지하게 자신을 책망하듯이 대답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꼬리를 내렸다.

    아들에게 다소 부끄러웠던 것이 사실이었으나 평소 익숙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얘야, 아빠가 잘못했다."라고 하면 될 것을, 아들의 머리통을 쥐어박으며 "가자, 장난으로 그래 봤다."라며 얼버무리고 말았다. 과연 누가 이 아버지에게 정죄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머지않은 미래에 하나님 앞에 설 때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말 것이 우리네 인생사가 아니던가? 한 사회의 사회화가 주도하는 문화적 양심에 준거하여 윤리와 도덕의 가치관이 사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겠으나 사람 사는 양식이 별반 차이가 없어 거의 대동소이(大同小異)하지 않을까 싶다. 

    신앙세계의 성경적 윤리와 도덕의 가치관과 거리가 먼 일반 불신 사회의 도덕률은 인생의 양심에 준거할 뿐이다.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제 마음, 곧 제 양심의 소견에 옳다고 여기는 대로 취한 행동에 대해 자신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고 흥분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보게 된다.

    의의 준거가 없고, 행동의 안천 장치가 없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이 시내산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부여받기 전까지는 인간행동이 죄의 영역 안에서 절대 영향을 받았음에도 그것이 죄임을 인지하지 못했었다. 그렇다고 시내산 율법 이전의 모든 세대가 지은 죄가 죄일 수 없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죄를 죄임을 알았던 몰랐던 죄의 정죄 아래서 자유할 인생은 아무도 없다. 다만 율법이 온 후로 죄가 무엇이며, 죄의 본질과 특성과 속성을 알게 되었고, 무엇보다 죄의 결과가 영원한 사망임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 무엇보다 죄는 사죄 받아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가 있고 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대속을 통한 속죄임을 알게 되었다.

    이를 우리 인간 스스로가 알 수 없었고, 율법의 정죄를 통해 사죄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의 비밀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위 이야기 속의 아버지는 순전히 자연인으로서 율법의 존재도, 정죄도, 사죄의 필요성과 절대성도 몰랐다. 다만 양심의 준거에 의한 도덕적 존재로서 최소한의 부끄러움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성격적 윤리 기준에서 아버지의 범죄 현장을 극복하고 있었다. 이것이 율법의 정죄를 통한 죄인임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연인과의 차이점이다. 사람이 자신의 양심이나 성경의 율법 앞에서 정죄를 피해 갈 수 있는  인생은 제 아무리 '법 없이 살 수 있다'라고 자부하거나 타인의 인정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성역도 예외도 없다. 

    그러나 은혜의 법은 다르다. 은혜의 법은 정죄가 주어가 아니다. 용서를 전제한 회심(回心)이 주어다. 곧 회개와 신앙을 합성한 것이 회심이다. 죄는 회개하고 회개한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힘입어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받고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래서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첫 사역의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다. 위 이야기 속의 아들을 보자. 얼마나 순수한가? 맑고 깨끗한 옹달샘의 생수 같은 강한 인상을 주지 않는가? 예수님은 이런 아이들을 모델로 세우시고 때묻은 어른들을 향해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누가 이야기 속의 아버지에게 정죄의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 기성세대들의 위선과 겉치레적인 양심에 비추어 봤을 때, 부끄러움과 잘못된 용기에 최소한의 진솔함을 가진 평범한 사회적 존재로 평가된다.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얼굴에 철판을 깐 철면피는 아니라는 말이다.

    사실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고 낙인찍힐 만큼 최악의 유명세를 치르는 인사들이 정계에도 경제계에도 교육계에도 종교계에도 제야의 묻힌 인사들에게도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지천에 깔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시대를 우리는 횡단하고 있다. 

    날마다 자신을 쳐서 십자가의 도 앞에 복종시키려 몸부림쳤던 곤고한 인생 바울 사도처럼 우리 그렇게 날마다 정신 차리자고 목매어 호소해 본다. 더 가지면 어떻고 덜 가지면 어떤가? 어차피 이 땅에서 살 동안 다 소비하고 가야 할 것들이 아니던가? 

    더 소중한 것, 그리스도의 소유권에서 제외되거나 버림받지 않기를 위해, 그리스도의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기를 위해, 주님으로부터 부인 받는 불법을 행한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기를 위해, 몸부림친 바울의 길에 꿋꿋하게 서서 십자가의 복음 꽉 붙잡기를 주문한다(고전 9:27).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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