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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진 서울대학교 사범대 연구생./아시아뉴스통신 DB |
오늘부터 저는 한 ‘경계인(A Marginal Man)’에 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자기변명’에나 어울릴 법한 말이라고 여깁니다만, ‘경계인’이라는 말은 그 나름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사회적 주변인(outsider)을 현학적(衒學的)으로 표현한 것으로, 좌파 사회학자로 하버마스의 제자인 송두율이 자기규정을 위해 사용해 유명해졌지요.
그것은 보통 서로 타협할 수 없는 두 개의 가치관을 지닌 집단 중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인간형을 이릅니다.
송두율은 자신을 ‘남북한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불행한 인간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이지요.
사족이지만, 역시 개인적으로, 그 규정은 명백한 오류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바로 엄존하는 경계인, 강유 앞에서 할 말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주지하는 바와 같이, 강유는 한실 재흥과 새로운 천하 창출이라는 두 국시(國是, ideology) 사이에서 두 쪽 모두에 서야만 했던 불행한 인간이었고, 1차 북벌 당시 제갈량에 귀순하면서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와 이별하고 그 홀로 계한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야말로 안간힘을 써야만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위나라 출신으로 계한 조정에서 두 번째 출사를 했기에’ 그는 끝내 경계인의 위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강유는 바로 그 배경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비장미(悲壯美)를 지녔고, 스스로의 선택에 후회가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던 진정한 영웅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제가 특별히 모두(冒頭)에서 이 사회학적 용어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강유는 하이에나처럼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논객들에게 희생된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제갈량처럼 빛나는 승리도 없고, 비의 등 주류 세력에게 견제당하면서, 단지 결과론적인 관점 상 ‘뭔가’ 한 방이 없다는 이유와, ‘한중 수비 전략 변경’에 대한 혹평까지 더해지면서 사정없이 찢겨지고 말았습니다.
한 마디로, 그는 오늘날 삼국지의 여러 인물들 사이에서 찬사도, 옹호도 없이 내팽겨 쳐진 ‘경계인’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백 번 양보해서, ‘그래도 최선은 다했지 않냐’는 말조차 없다는 사실은 얼마나 강유에 관해 왜곡된 시선이 엄존하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과연, 제가, 이제 와서 강유를 ‘비호’해볼 수 있을까요?
여러분 판단하기 나름이겠지만, 그 일을 하려면 짧은 사료 속, 행간의 의미들을 추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건 사학 연구의 태도로 아주 위험하고 어려운 일입니다.
사학은 경험적 추론이라는 연구 방법론을 사용하기 때문에 ‘논리적 비약’의 위험을 항상 내재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결과론적 접근의 유혹은 아주 막강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강유는 계한 최후를 장식한 인물이기에 ‘책임론’까지 들먹이며 몰아붙이기도 용이한 위치에 있습니다.
지금 그런 그를 감히, 비호해보겠다고 하는 것이니 전혀 가능해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그를 경계인으로 정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제갈량 이후 시대를 이끌었던 장완, 비의에 비해 다른 입장이라는 사실을 참고해 보자는 이유입니다.
쉽게 상상해보면, 북한 장성 출신 인사가 한국의 참모총장으로 취임한 상황을 생각해보시면 됩니다.
그런 그에게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전적인 신뢰’를 가져 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어려운 일인지 생각해보십시오.
게다가 강유의 시대는 유사 이래 ‘정상화의 방식으로 나라를 망친’ 기묘한 시기였습니다.
의아하실 수 있겠지만, 유선은 비의의 집정과 동시에 ‘친정(親政)’을 시작했고, 강유가 등장하자 재빨리 내정을 분리, 군부와 행정 중 후자를 황제가 장악하는 조치를 취합니다.
보통 이런 경우 우리는 ‘정상화 = 혁신과 발전’으로 보아야 하는 게 일반적인 수순입니다.
그런데 유선은 그와 정 반대로 정상화를 기도하면서 나라를 망치기 시작합니다.
비의의 후임자인 진지는 황호, 초주와 더불어 행정을 틀어쥐고 건실했던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키기 시작합니다.
오죽하면 제갈첨 등이 염우(閻宇)를 대장군으로 두려는 초강수를 두면서까지 강유를 내정에 끌어 들이려고 시도했던 것입니다.
즉, 일시적으로 군권 대신 행정으로 옮기게 함으로써 이 주류 세력을 꺾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만큼 계한의 내정은 아주 빠른 속도로 굉음을 내며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이 때 강유는 위나라 정벌의 골든타임을 놓치고 난 뒤 찾아온 위기를 수습하고자 북벌을 개시했습니다.
보통 이 부분에서 가장 많은 비판이 떨어지고 있습니다만, 제 개인적 견해로 보면, 이는 ‘제갈량 시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강유의 선택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즉, 제갈량이 북벌을 통해 ‘한실 재흥’의 이념을 강화하고 단합시켰듯이 그 유업을 계승, 다시 그 이념을 상기(想起)시키고 무너지는 국가의 기강과 안으로부터 다가오는 위기를 수습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강유는 전쟁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통해 계한의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이지요.
그런 점으로 보면, 강유는 시간적으로 참 불리하고 좋지 않은 출발선에 있었던 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