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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일 영결식장에 눈이 내리는 가운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영정을 시민들이 쳐다보는 모습./아시아뉴스통신=박신웅 기자 |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장례는 서거일로부터 26일까지 5일장으로 치뤄졌으며 영결식이 열린 후 안장식은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다.
9선 국회의원부터 제14대 대통령까지. 김 전 대통령의 정치인생을 되돌아봤다.
◆대한민국 최연소 의원, 최다 당선 의원 YS
1950년 서울대학교 철학과 3학년에 재학중이던 김 전 대통령은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선거운동원으로 활동하다가 1951년 장 전 총리의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1954년 5월에는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경상남도 거제군에서 출마해 승리, 3대 국회의원으로 국회에 첫 등원했다.
당시 나이 28세.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이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총 9차례에 걸쳐 국회의원직을 수행했고,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과 함께 아직까지 깨지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깨지기 어려운 최다의원직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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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 모습./아시아뉴스통신DB |
◆YS '소신의 정치인'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자유당에서 국회의원에 처음 당선됐으나, 그해 11월 당시 3선개헌으로 논란을 빚자 이승만 대통령에게 "3선개헌은 안된다"고 직언하기도 했다.
하지만 사사오입이라는 헌정사 초유의 사건을 통해 무리하게 3선개헌을 통과시키자 김 전 대통령은 자유당을 탈당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후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민주공화당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오히려 군부가 약속대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하며 거부했다.
또 1978년 "YH무역사건"이 발생했을 때에는 외신을 통해 "미국은 당장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사건으로 김 전 대통령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고, 이것이 "부마항쟁"의 기폭제가 돼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분수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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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6년 9월 문민정부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의 모습./아시아뉴스통신DB |
◆'문민정부' 진짜 민주화 시대가 오다
1992년 14대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을 꺾고 당선돼 '문민정부'라 명명했다.
이후 과감한 개혁을 시작했다. '역사 바로세우기'라는 명분 아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당시까지 5.18 광주사태로 폄하돼왔던 것을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켜 교과서에 기록하게 했다.
당시 군사쿠데타를 자행했던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워 전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 노 전 대통령에게 징역 17년을 선고받게 했다.
고질적인 한국경제의 문제로 지적됐던 차명계좌, 금융비리 등을 없애기 위해 '금융실명제'를 실시했고, 철저한 행정개혁을 통해 '고위공무원 재산내역'을 전부 공개했다. 물론 재산공개 명단에는 '김영삼' 본인도 포함돼 있었다.
또 군사정권 시절 정치범 등으로 수감됐던 예술인들을 석방해 '표현의 자유'를 대폭 강화하는 정책을 펼쳐 민주주의의 영역을 한층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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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5년 당시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아시아뉴스통신DB |
◆YS가 남긴 유훈, '통합, 화합'
김 전 대통령은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쇄약해진 상황에서도 글을 통해 유훈을 남겼다. 그것이 바로 '통합과 화합'.
상도동계의 막내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아들'로 알려진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마지막 유지였던 통합과 화합의 정신을 받들어 국민 통합의 대한민국, 세계 속의 선진 대한민국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야당 의원들도 조의를 표하는 가운데 새정치민주연합은 브리핑을 통해 "마지막 가는 길에 우리에게 던져준 '통합과 화합'이라는 화두를 깊이 되새기겠다"며 "고인의 바람처럼 분열과 불통이 치유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