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27일 토요일
뉴스홈 칼럼(기고)
[우도기행(1)] 문화공간 노닐다 - 우도를 걷는다

[제주=아시아뉴스통신] 이재정기자 송고시간 2015-12-22 08:01

 우도여행의 백미는 여명 깊은 새벽 혹은 노을이 바닥을 기는 해질 무렵이 좋다. (사진제공=문화공간 노닐다)

노닐다지기 박신옥

<밤 산책>

  카페 문을 닫고 길을 나선다. 바퀴들의 세상이 끝난 시간, 길은 어둠 속에서 나의 느린 발걸음과 함께 깨어 있다. 하루 종일 무례한 바퀴들의 굉음으로 몸살을 앓았던 길은 이제 오롯이 길만의 시간, 길만의 적막 속에서 상처 입은 짐승이 제 몸을 혀로 핥듯이 스스로를 위무하고 있다.

 길에게 사람들의 발소리와 소통하는 일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몇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의 체온을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당신은 피곤하군요. 발을 끌고 가다시피 하네요. 조금만 더 가면 쇠물통 언덕이니 거기서 다리쉼을 하세요.  당신은 예전에도 왔었지요. 물푸레나무를 닮은 당신의 걸음걸이가 기억나요. 쇠머리오름까지 내처 걸으실 건가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제 길을 바퀴의 속도를 보장해줄 만만한 바닥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길 가에 핀 꽃양귀비와 금잔화 위에 잔뜩 먼지를 덮어씌우고 쏜살같이 질주할 뿐이다. 왜 이 섬의 눈개쑥부쟁이들은 육지의 쑥부쟁이와 달리 키를 낮추고 옆으로 뻗어 가는지, 해안에 널브러진 부표들의 고리부분이 얼마나 다양한지, 걷다가 잠시 멈춰 고개만 숙이면 이네들의 표정을 읽을 수 있을 텐데......

 해가 떠 있는 동안 길은 카레이싱 코스나 마찬가지다.

 천진항에서 어둠에 잠긴 성산일출봉을 바라보다가 빨간 등대를 뒤로 하고 서빈백사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해안에 닿는 물결은 선명한 촤르르륵 소리를 들려주고, 들풀도 별자리도 모두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밤의 조용한 산책길, 나 또한 어떤 다른 이름도 없이 오직 길 걷는 이로 걷는다.

 목을 휘감는 상쾌한 바람에 피부의 솜털과 세포들이 생생해지는 것을 느끼며 걷는다. 발목에 맑은 힘이 고인다. 그 맑은 힘만이 길을 안내하도록 잠시 상념을 버린다. 그리운 이를 떠올리지 말 것, 마지막까지 흔들린 단어 하나마저 놓을 것, 길의 숨소리에만 내 발걸음의 주파수를 맞출 것.

 해안길의 모퉁이를 돌아 바람 타는 서빈백사에 닿는다. 낮 동안 번잡했던 이 고요한 해변에 사람 하나 없고, 고양이 두 마리가 재빠르게 지나간다.

 벤치에 앉아 땀이 약간 밴 셔츠의 윗 단추 두 개를 풀고 가슴에도 한껏 바람을 들인다. 그새 파고드는 상념들을 떨쳐내는 주문으로 바람, 이라고 읊조려 본다.

 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바람.........................

 더 이상 바람의 주문을 욀 필요가 없어질 즈음 눈을 감는다. 정수리 끝에서 어깨로 복부로 다리로 발가락으로, 무념으로 얻은 고요한 생기를 내려 보낸다.

 감은 눈언저리의 힘을 빼고 앞바다에 바늘구멍만한 가상의 점을 찍는다. 마음으로 그 점을 한참 동안 응시하고 있으니 바늘구멍은 점점 커지면서 환해진다. 나는 그 곳을 통과한다.

 사람의 말로는 포획할 수 없는, 사람의 시선으론 가늠할 수 없는 무한의 공간이 펼쳐진다.

 무량무변, 끝이 없다. 아무도 없다. 소리도 없다. 나는 그 공간을 거침없이 걸어간다. 걸어가면서 나도 사라진다.

 다시 카페로 돌아오면서 길에게 조곤조곤 말을 건넨다. 너의 영혼을 보았다고, 이정표 하나 없고 폭도 길이도 없는 무한한 너의 영혼을 보았다고.
 길은 대꾸하지 않고 그저 내 발소리만 조용히 듣고 있다.


※사외 기고는 본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실시간 급상승 정보

포토뉴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