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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목사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3-13 15:50

수원 우리가꿈꾸는교회 김병완 담임목사.(사진제공=우리가꿈꾸는교회)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

1. 약 12년 전 출석하던 교회서점에서 제목에 이끌려 구입한 책이 있다. 
필립얀시가 쓴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IVP)>이다. 작고 가벼워 여러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강렬한 10글자의 제목에 사로잡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가장 기억에 남는 제목의 책을 꼽으라면 단연 그 10글자다.
 
2. 2014년 <가나안 성도, 교회 밖 신앙(청어람)>이 출간된 후 6년이 흘렀다. 
가나안 성도는 글자를 거꾸로 한 언어유희로, 교회를 ‘안나가’는 성도를 가리킨다. 영어로는 Churchless로, Homeless와 같은 맥에서 보면 된다. 책에서는 성도들이 신앙이 아니라 교회를 버리는 3가지 이유로 ‘숨 막힘’, ‘위선’, ‘분쟁’을 꼽는다. 
저자는 성도들이 ‘숨 막힌’ 이유로 먼저 목회자의 권력남용을 지적한다. “교회 안에서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빙자하여 어떤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교회를 위한다’며 부당한 일에 눈감을 것을 종용하는 일이 벌어진다.” 
둘째는 다수에 의해 소수가 배제되는 경험이다. 그것을 가리켜 “자신의 존재감이 지워지는 경험을 할 때”라고 꼬집는다.

전체를 위한 부분의 소외,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대의를 위한 개인의 침묵이 강요되는 곳에서 우리는 숨을 쉬고 살기 어렵다고 느낀다. 어릴 때 누구나 한 번씩은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다 물속에 빠져본 기억이 있다. 물 속에서 숨이 막힐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공기를 찾아 도망치듯 나온다.

3. 하나의 몸이지만, 동시에 <여러 지체>이기도 함을 말해야 했던 교회시대(12a).
우리는 그런 시대를 지난 10년 동안 아니 그 이상 살아야 했다. 사제주의에 반해 만인제사장을 외치며 나온 개혁교회였지만 우리의 이상과 현실에서 경험되는 교회는 사제주의를 용기있게 벗어던지질 못했다. 
 군대문화, 유교문화가 뒤섞인 교회는 윗사람 앞에 질문할수 없는 구조가 유사했다. 질문할 수 없는 문화는, 맹목적인 순종을 요구한다. 그것이 옳다고 느껴서가 아니라, 옳은 것이라고 말하니까 우리는 따랐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이라곤 빠른 의사 결정과 막힘없는 진행, 다수의 동참으로 지도자가 만족했는지 모르지만 가시덤불을 치우지 않고 행군한 마냥, 불필요하게 많은 사람이 상처를 얻었다.

바울은 각 지체 안에 우열이 없음을 말한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17-18)
우리는 누가 더 뛰어나고, 부족해서 맡겨진 일이 다른게 아니다. 모든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자리에 두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그리스도 몸 안에 평등하다. 모두 다 교회를 이루는 동역자다.

이 사실을 붙잡아야 숨을 쉴 수 있었던 시절이 나도 조금 있었다.

4. 여럿이지만, 다시 <하나의 몸>을 말해야 하는 교회시대(20).
찢겨지고 상처난 아픔은, 누구나 다시 언급하고 싶지 않다.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기에, 다시 가까이 하고 싶지도 않고, 깊게 관여하고 싶지도 않다. 마치 똑같은 거짓말에 여러번 속은 아이처럼. 상처 받고 싶지 않기에 다시 전처럼 돌아갈 마음이 좀처럼 생기지 않는다. 어차피, 하나이면서 동시에 여럿인 교회가 아니던가.
그러나 바울은 18절까지 각 지체의 중요성을 말하던 논조를 뒤바꾸어 말한다.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19). 
몸을 주소를 물으며 바울은 우리가 결국 어디를 향해야 하는 지를 확인시킨다.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20).

다시 몸을 말하는 바울의 주장과 관련해 바른미디어 조믿음 목사는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에 다른 성도를 부인하는 것은 곧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몸을 향하지 않고는, 자신의 건강함 또한 생각해볼 수 없다.

5. ‘용서하라’고 번역된 헬라어 ‘아폴루오’는 1) 풀어주다, 2) 놓아주다는 뜻이다. 
필립얀시는 이 단어를 말하며 이제는 ‘자신을 풀어주라’고 말한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37절에 아폴루오를 두 번 사용하시면서 용서의 의미를 바로 잡으신다. “용서하라(풀어주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풀어질 것이다)”
용서한다는 것은, 이제 그만 자기 자신을 매임에서 놓아주는 의미가 된다.

이제는 그만 자신을 놓아주자.

6. 교회는 여전히 나의 고민이지만, 나의 사랑이다.
나를 비롯해 주변에도 교회 때문에 웃고, 교회 때문에 울었던 분들이 참 많았다. 
모든 사람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면, 해아리기 어렵다.
아파하셨기 때문에, 함께 아파해주는 것 말고는 해줄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10년이 흘러버렸다.
이제는 제법 웃으며 말하기도 한다.

이제 다시, 여럿이면서 한 몸인 교회를 이야기 해보자. 아팠기에, 두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다시 한 몸, 연합을 이루는 기쁨을 이야기 해보았으면 좋겠다.

마침, 겨울이 지나고 봄이왔다.
<고린도전서 12:12-20절>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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