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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백석대학교 역사신학 장동민 교수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3-22 17:18

백석대학교 장동민 교수.(사진제공=백석대학교)


<교회여, 응답하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간절하고 긴박한 소망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고 그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한 세상으로부터 당신의 백성들을 건지셨고,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실행하는 대리인이 되게 하셨다. 교회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선악을 분변하며, 나아갈 길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 한반도는 냉전의 마지막 고리를 끊는 더디고 지루한 과정을 지나고 있다. 익숙한 옛 질서와 아직 오지 않은 새 질서 사이의 갈등과 혼선이 공존하고, 동아시아 역학관계의 재편을 두려워하는 주변 열강의 간섭과 도발은 사뭇 위협적이다. 우리 사회는 양극화가 고착된 저성장시대를 맞아 역동성이 상실되고 젊은이들은 미래를 꿈꾸지 못한다. 4차 산업혁명이 다가오지만 혁명 전야의 기대와 설렘 대신 디스토피아의 공포가 우리를 압도한다. 사회 각 분야의 지도층은 자신의 영혼을 자본의 힘에 굴복시켰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그 힘에 압살당하고 있다. 무계획한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최고의 덕목이 되었고, 서로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우리 정신을 좀먹는다. 
 교회는 한 마디로 지리멸렬(支離滅裂)이다. 자신과 사회의 죄악에 대한 자각도, 용서 받은 자로서의 환희와 겸손도,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목마름도, 최후의 승리에 대한 희망도 잊은 채, 오직 기존질서의 안락함에 길들여진 중산층의 사교클럽으로 전락한 듯하다. 보수적 기독교는 세속화의 늪에 깊이 빠져 허우적대며 공포심과 분노로 자신을 정의한다. 진보 진영도 과거에 가졌던 사회 변혁의 신학과 동력을 상실하고 각자의 아성에 할거한다. 교회의 개혁을 외치며 새로운 교회를 제안하는 움직임들이 있으나 작은 웅덩이에 불과할 뿐 이렇다 할 실개천조차 형성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교회가 우리 사회에 윤리적 각성을 일으키고 변화의 방향을 제시하였던 시절이 있기나 했었는지 아련하다. 대다수의 교회들은 사회변혁의 꿈을 더 이상 꾸지 않는 패배주의에 빠져 있으며, 일부는 자신들이 우리 사회를 타락으로부터 지키는 영적 보루라는 ‘정신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어둡고 깊은 밤의 끝은 미명(微明)의 시작이다. 지금이 바로 한국 교회가 우리 사회 변혁의 깃발을 들 때다. 먼저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사회와 교회의 죄악을 밝히 드러내고 통회하는 것이 우선이다. 성경의 관점에서 우리의 앞길을 밝히는 큰 그림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하여야 한다.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로 가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소망을 전해야 한다. 이는 어두운 시대에 빛을 비추어 세상에 샬롬을 가져오기 위함이기도 하고, 교회가 본질적 사명을 회복하기 위함이기도 하다. 개인의 노력과 개별적인 봉사도 중요하지만, 한국교회와 기독교 지성이 힘을 모아 “한국기독교 사회선언”을 함께 만드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과연 지금처럼 기독교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때 우리가 이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회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일한 진리이고 그 말씀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할 대리인으로 교회를 택하셨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주신 진리를 간직한 그리스도인 외에 누가 자본과 권력이 주는 허상에 현혹되지 않고 모든 절망 속에서도 종말에 이루어질 하나님의 다스림을 소망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타자성(他者性)을 믿는 그리스도인 외에 누가 세상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를 상상할 지혜와 자신의 신념과 입장(立場)을 회의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겠는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믿는 그리스도인 외에 누가 모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대화의 장으로 끌어들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이 세대에 필요한 당신의 뜻을 보여주기 위하여 우리의 양손에 성경과 역사(歷史)를 쥐어주셨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세계를 그릴 수 있으며, 또한 우리의 근대사를 돌아봄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비평적으로 볼 수 있다.  

 <사회선언의 표준: 성경>
 오늘날 한국교회가 우리 사회의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기 위하여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이데올로그나 사상가들 혹은 여론이나 출처를 알 수 없는 뉴스를 표준으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현실의 이념들을 심판하고, 그것들을 초월하는,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실현가능한 적실성 있는 표준을 제시한다. 
 신약성경을 읽는 사람들은 신약이 거시적 사회윤리를 제공하지 않는 것에 놀랄 것이다. 임박한 종말을 기다리면서, 기존 질서를 인정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성결과 화평을 추구하며, 박해를 견디라는 소극적 메시지가 윤리의 전부인 것처럼 보인다. 당시 로마제국의 군국주의나 노예제도, 또한 그 사회에 만연한 억압과 불평등과 같은 구조적 악을 비판하는 내용을 찾기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신약을 저술한 인간 저자들은 누가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유대인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어려서부터 토라에 익숙하고, “언약적 신율주의”가 제시하는 세계관을 체득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볼 수 없는 대제국의 억압 속에서 예언서와 시편을 외우며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다. 
 토라 안에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들이 분리될 수 없도록 연계되어 있다. 영적·종교적 계율과 사회적 삶의 일치와, 한계로 가득한 현실 세계에서 이상(理想)을 실천하는 지혜와, 정의와 사랑의 조화가, 일상적인 언어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토라가 추구하던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다. 이스라엘 실패의 기록은 우리의 반면교사가 될 수 있고, 또한 우리는 그 실패로 인한 격랑 한 가운데서 고뇌와 눈물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였던 예언자들의 위대한 정신과 만날 수도 있다.
 토라와 예언서와 시편을 가슴에 품고 신약을 읽으면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명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결국 토라를 주신 하나님의 소망을 설명하셨다. 바울은 토라(율법)를 뛰어넘는 믿음을 주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에게 토라는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었다. 요한계시록은 로마제국의 군사적 폭력과 불평등과 상업주의와 향락산업을 비판하고, 눈물과 고통이 없는 신천지를 소망함으로 악한 제국을 살아내도록 돕는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미래 세계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나 보수주의자들이 제시하는 사회이론을 공부하기 전에, 구약과 신약이 제시하는 이상적인 하나님의 다스림을 포괄적으로 또한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성경 계시를 요약하여 하나님 통치의 내용을 몇 가지의 정언명령이나 추상적인 덕목으로 환원하고, 여기에 자신들의 이념을 집어넣으면 안 된다.

 <우리 근대사에 나타난 사회선언의 전거(典據)>
 한국교회 사회선언을 위하여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資源)이 또 있으니 바로 우리의 역사이다.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두 가지의 유익을 준다. 하나는 과거로부터 배우는 것이다. 선조들의 지혜를 얻기도 하고, 혹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경고를 받기도 한다.(고전10:6,11; 유1:7) 예컨대 3.1운동으로부터 다종교사회에서의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배울 수 있기도 하고, 해방 후 기독교계에서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을 반성할 수 있다. 둘째, 이보다 더 중요한 유익이 있으니, 곧 역사를 공부함으로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를 알게 될 때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할 수 있고, 또한 과거의 유산을 상대화하여 이를 넘어설 수도 있다. 
 한국 기독교의 사회참여의 역사를 거칠지만 다음과 같이 구분해 보자. 현재까지 세 번의 막(幕)이 끝나고 제4막이 막 시작되었다. ① 제1막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로서, 초창기 한국기독교는 반봉건·반외세라는 시대적 과제를 매우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근대화에 앞장서고 저항적 민족주의를 진두지휘하였다. 당시 기독교의 사회선언을 꼽으라면, 최남선이 기초한 ‘기미독립선언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공화주의, 인도주의, 저항적 민족주의, 일제에 대한 복수가 아닌 광정(匡正), 평화주의, 새로운 문명에 대한 기대 등 처음부터 끝까지 기독교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근대화와 민족주의라는 초창기 기독교의 유산은 우리 기독교의 성격을 결정해 주었다.
 ② 제2막은 해방 후부터 70년대 말까지로서, 친일청산에서는 실패하였으나 반공과 산업화라는 국가적 아젠다의 기수로서 역할을 수행하였다. 기독교의 표식인 십자가와, 반공과 산업화를 상징하는 태극기, 그리고 이 둘의 든든한 수호자 성조기의 조합이 이 시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사회선언은 1968년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이다. 민족주의, 반공, 산업화의 역군을 키우기 위한 덕목이 비장한 필치로 서술되었는데, 이것들은 당시 기독교의 이념과 맥을 같이 한다. 
 ③ 제3막은 민주화를 성공적으로 달성한 80년대부터 최근까지다. 이때부터 한국의 기독교는 시대적 과제로부터 멀어져서 변방으로 밀려나기 시작하였다.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였고, 민주화 이후 개혁적 복음주의 그룹이 형성되었을 뿐이다. 역설적이게도 기독교가 사회의 주류로부터 멀어져 간 때,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기독교의 사회참여에 관한 신학적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결과 여러 종류의 선언서와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대표적인 것 몇 가지를 들자면,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정의, 평화, 창조의 보존”(JPIC)이 정립되었고, 복음주의권에서는 로잔언약(Lausanne Covenant, 1974)과 케이프타운 서약(Cape Town Commitment, 2010)에서 사회참여를 선언하였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 산업선교의 열매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에서 1986년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바 있고, 1988년에는 KNCC가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발표하였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자랑의 면류관과 부끄러운 낙인을 동시에 남겼다. 우리 교회와 민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면서 자랑스러운 유산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또한 현재의 부끄러운 모습들도 우리의 것임을 인정하고, 서로 이해하고 서로 반성하며 미래를 기약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선언이 다루어야 할 아젠다>
 2018년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은 이른바 ‘87체제’를 마감하고 새로운 막이 시작됨을 알리는 종소리였다. 만일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순조롭게 이행된다면 한국 사회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하였던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돌입하게 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이 결국 남북분단으로 귀결되는 것을 목격하였던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비핵화가 정의와 번영을 가져다 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곧 천국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의 악(惡)이 물러가면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새로운 악(惡)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우리 시대 사회선언이 다루어야 할 아젠다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미래 우리나라의 이념적 지형
 ⦁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한 신뢰 구축 방안
 ⦁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영향력으로부터 주권 지키기
 ⦁ 전쟁과 평화
 ⦁ 다원화 사회에서의 국가주의
 ⦁ 자유시장경제와 복지국가
 ⦁ 생태계 파괴에 대한 창조의 보존
 ⦁ 성(性) 정체성, 동성애 관련 이슈
 ⦁ 차별과 혐오 방지
 ⦁ 교회와 국가의 관계
 ⦁ 기술 문명과 생명윤리
 ⦁ 교육의 공공성과 자율성
 ⦁ 종교 간 대화와 협력 방안

 <한국교회사회선언의 작성 방식: 공론화위원회>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총회는 이후에 이루어질 역사적 회의들의 전형을 제공한다. 예루살렘 총회의 논점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할례를 비롯한 구약의 의식법(儀式法)들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인데,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속한 사회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지켜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믿음의 본질 문제와 직결되어 있음이 드러났다. 바나바와 바울이 세운 이방인 교회는 이 문제 때문에 혼란스러웠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당황하였다. 여러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예루살렘 총회의 논의에 참여하는데, (요즘 표현으로) 맨 오른쪽에는 바리새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도 할례를 비롯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행15:5; 고후3:14), 맨 왼쪽에는 율법폐기론자들이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당시는 율법폐기론이 가상적으로만 존재하였겠지만 곧 출현하게 될 것이다. 롬3:13; 약2:14 참조) 중도우파로서 베드로와 야고보, 중도좌파로서 바나바와 바울이 각각의 공동체를 대표하여 자신들의 성경해석과 경험을 가지고 토론에 참여하였다. 
 “많은 변론”(행15:7)과 격렬한 토론이 오간 끝에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른바 평등한 ‘공론장’(公論場)에서 ‘집단지성’이 발휘되어 성공을 거둔 사례이다. 구시대를 대표하는 세력과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뜬 사람들이 공존하였고, 권위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자유로운 토론이 이루어졌다. 이들이 자신들의 논지를 세우기 위하여 중요하게 여겼던 준거는 세 가지인데, 상황의 변화와 성경(구약)의 가르침과 성령의 역동적인 일하심이었다. 이들은 이방인의 대규모 회심이라는 전에 없던 상황을 경험하는 것이고 이는 곧 기독교 세계화의 전조였다. 우파는 전통적 성경해석을 고집하였지만 야고보는 아모스서를 인용하여 이방인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린 새로운 시대가 왔음을 인정하였다. 바나바와 바울은 1차 전도여행에서 체험한 성령의 사역을 이야기하였고, 베드로는 욥바에서 본 환상과 이방인 고넬료의 가정이 성령세례 받은 사건을 증언하였다. 예루살렘 총회는 그 결정을 “성령과 우리”가 내린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사회선언의 작성 주체는 누구이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를 주(主)로 고백하는 모든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문제에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 관심을 보여 온 운동의 주체들이 공론화위원회 형식의 위원회를 만들어 그 위원회가 작성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1980년대 이후 기독교인의 사회참여에 관심을 가진 그룹들은 매우 다양하다. 이른바 뉴라이트의 정신을 이어 받은 우파, 민주화와 민중운동,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진보 측, 기독교세계관 운동 그룹,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성서한국 등 개혁적 복음주의 진영, 기독교인의 사회참여 관련 저서와 잡지를 지속적으로 출간한 기독교 출판사, 평신도 대상 아카데미 등이 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개혁운동에 앞장서고 새로운 교회 운동을 시작한 청년그룹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사회의식이 강한 ‘386세대’가 작성하여 후배들에게 던져주는 형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지역교회와 노회, 연회, 총회 등의 대(大)교회도 참여할 수 있고, 각 교단의 신학교에 속한 신학자들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다.
 진보, 보수, 중도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단 상대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 고집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논의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주의 깊게 선별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경우 진보와 보수의 입장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또한 진보와 보수는 세계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과연 이 일이 가능할 것인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한두 해에 걸친 몇 사람의 노력으로 사회선언이 만들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에 유대인과 이방인, 종과 자유자, 남자와 여자가 주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하면, 우리 진보와 보수의 벽 정도는 넘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한반도에 평화와 번영의 체제가 정착되고, 정치적 진보와 보수의 극단적 갈등이 해소될 것이 예상되는데, 친일청산에 실패하고 민주화에 뒤처졌던 한국교회가 이번에는 앞장서서 사회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인가? 온 세계가 좌우로 분열된 시대, 대한민국의 교회가 이를 극복한 첫 사례가 못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과제를 해결한 멋진 기독교를 우리의 후손에게 물려주려는 것은 허황된 꿈을 꾸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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