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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기획 창', 재일학도의용군 포화 속으로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이상진기자 송고시간 2021-06-06 13:01

(사진제공=KBS)


[아시아뉴스통신=이상진 기자] 병역의무도, 참전의무도 없었지만 위기에 빠진 조국을 위해 포화 속으로 뛰어든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일제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한반도는 비극의 전장이 되었다.

불과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무기력하게 밀려나는 국군에 낙동강 방어선은 마지막까지 버텨 지켜내야 하는 최후의 전선이 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운명이 위기를 맞고 있던 그 때, 병역의무도 참전의무도 없었지만 기꺼이 바다를 건너와 전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든 사람들이 있다.

조국 수호를 위해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642명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바로 그들이다. 맥아더 사령부와 함께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천 앞바다에 도착한 이후, 원산을 거쳐 함흥, 나진, 압록강 일대까지 진격하고, 장진호 전투와 백마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재일학도의용군들, '시사기획 창'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목숨 바쳐 싸웠던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따라가 본다.

■ 메이지, 와세다, 게이오 대학 등 일본 명문대학 유학생들의 뜨거운 참전 열기

‘조국을 구하는 길에 군번도 계급도 중요하지 않았다.’

한국 전쟁 발발 직후, 신문 호외 등을 통해 조국의 위기를 알게 된 재일동포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나라를 잃은 설움과 차별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재일동포들 사이에서 또 다시 조국을 잃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하나로 모이게 되었고, 이들은 구국을 위해 누구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

민단을 중심으로 국군 장병과 피난민들에게 보낼 위문품과 성금 모금, 의약품 지원이 신속하게 진행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동포들은 직접 참전하기로 결심했다.

도쿄와 오사카, 규슈 지역의 열다섯 개 학교에서 유학중이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자원 입대자들이 모여들었고, 신체검사 등을 통해 최종 선발된 642명이 1진부터 5진까지 나뉘어 차례로 구국 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전황이 매우 불리하고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런 위기의 상황 속에서 재일학도의용군들은 병역 의무도 참전 의무도 없었지만 누구보다 용감하게 전장으로 뛰어들 결심을 하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 당시 이들에게는 군번도 계급도 부여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 인천상륙작전에서 장진호 전투, 백마고지전까지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보여준 숭고한 애국심

1950년 9월15일 오전 6시 30분. 집중 함포 사격으로 시작된 ‘작전명 크로마이트’. 1/5000의 성공확률을 뚫고 인천으로 상륙했던 미7사단과 함께 재일학도의용군 1진도 인천으로 들어왔다.

고학력자가 대부분이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은 초기 한국 지형을 잘 몰랐던 미군을 돕기 위해 주로 통역과 안내를 맡는 요원으로 활동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은 급격히 와해됐고, 이후 투입된 재일학도의용군들 중에는 원산을 거쳐 함흥, 나진까지 진격하고 압록강 일대까지 진격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군의 기습 참전으로 전장은 다시 혼돈에 빠졌고, 약 2주간 치열하게 전개된 장진호 전투에서는 미7사단에 배치됐던 재일학도의용군 80여명이 실종 희생되기도 했다. 고지전은 더욱 참혹했다. 철의 삼각지대를 지키는 전략 요충지였던 백마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치열하게 맞붙었던 고지전은 근접 전투로 승패를 가려야 했기에 더 힘든 전투가 이어졌다.

그 중에는 일본으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끝까지 조국 전선에 남아 싸우기를 원했던 재일학도의용군들이 있었고, 그들은 초급장교를 배출하던 육군종합학교 제22기로 입교해 다시 전장으로 돌아가 끝까지 목숨 바쳐 싸우기도 했다.

그렇게 3년간의 전쟁에서 국군과 미군 각 부대에 배속돼 참전했던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중 135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이제 아흔을 넘긴 재일학도의용군 생존자들이 시간이 지나도 흐릿해지지 않는 당시의 전황을 회고한다.

■ 휴전, 총성이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막혀버린 재일학도의용군

1953년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에 휴전 협정이 맺어지고 전장을 울리던 총성과 포성이 멈추었다.

그런데 전쟁이 멈추고 일본에서 건너온 참전자들은 전역 후 당장 갈 곳이 없어졌다. 휴전 1년 전인 1952년 미국과의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가 재일학도의용군들의 국적을 문제 삼으며 생존자 507명의 입국을 거부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 버린 재일학도의용군 생존자들은 부산 초량동의 사찰인 소림사에 머물며 다시 귀국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들 중 국적 문제가 해결돼 일본에 있는 가족 품으로 또 학교로 돌아간 이들도 있지만, 상당수의 재일학도의용군들이 마지막까지 귀국이 거부돼 이곳에 홀연히 남기도 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전선으로 뛰어들었던 재일학도의용군들, 하지만 전쟁이 멈추고 가족도 연고도 없이 생계를 꾸려야 하는 이들의 삶은 막막함 그 자체였다.

■ 다시 불러보는 그 이름, ‘친구야, 우리가 너 때문에 살고 있다.’

7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재일학도의용군들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고 이제 한국에는 단 세 명만이 생존해 그 날의 일들을 기억하고 있다.

재일학도의용군 희생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현충원 제16묘역, 아흔을 넘긴 박운욱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장은 기회가 될 때마다 이곳을 찾아 동지들의 이름을 불러 본다.

묘비마다 남겨진 이름을 보며 어제 일 같이 그들을 기억하는 박운욱 재일학도의용군 동지회장,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았던 642명 재일학도의용군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역사에 남아 기억되기를 바라는 노병의 마지막 소원을 '시사기획 창'에서 들어 본다.

dltkdwls31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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