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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참좋은우리교회 정원석 목사, '반쪽 신앙'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1-12-27 05:00

인천 참좋은우리교회 담임 정원석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욥기 37:14~24 
전능자의 두려운 위엄만 부각하는 반쪽 신앙

‘하나님을 경외함’은 성도들의 기본적인 믿음의 자세입니다. 
‘하나님을 대할 때 어떻게 대하는가?’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대하는 자세를 보면 그 마음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에는 두 가지 큰 기둥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없으면 하나님으로서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이 있어서 순종도 따르는 것이고, 두려움이 있어야 위엄도 있는 것이며 두려움이 있어야 자신의 죄를 돌아보거나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합니다. 
만약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죄를 지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할 것’이고, 
‘자신이 행한 대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생각이 없다면 ‘악을 심어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악한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인간이 죄를 짓기 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친근한 관계를 유지했으며 항상 하나님과 소통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고 살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사랑을 고백하는 친근하고 아름다운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이 죄를 지은 이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관계를 끊고 혼자 숨어 버렸으며 하나님이 불러도 두려워서 하나님 앞에 나타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죄가 더욱 짙어지면서 이제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양심’이 되어 버렸습니다. 
말세에 가장 큰 징조는 자연의 이상적인 반응이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의 상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상실한다면 그 순간부터 사단은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버리게 만들고 죄를 지어도 결코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심판 주이신 하나님’, ‘나의 삶을 지켜보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 ‘내 잘못에 대해 엄위하신 하나님’, 
그리고 ‘내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

둘째는 두려운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고 행한 대로 갚으시는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한없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엄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인자와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요한의 말은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도 하시지만 한없는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두려운 하나님이시다’면 인간은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에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시다면 ‘인간은 모두 죄악으로 인해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은 무한한 사랑을 베푸십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욥에 대해서는 ‘심판하시는 하나님’,‘엄위하시는 하나님’,‘우리가 함부로 함께 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해서만 강조하는 모습입니다. 

1. 엄위하신 하나님(23)
하나님은 ‘엄위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맞습니다. 우리가 흔히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공의롭다’는 것은 ‘잘못을 분명히 판단하시고, 잘한 것도 분명히 판단하신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기고 교만을 싫어하시며 자만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사람들에게 기만당하는 것을 결코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특히 인간의 죄를 그냥 두시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아울러 사단과 악한 자들뿐만 아니라 악한 영들까지 하나님은 엄위하신 하나님이시기에 반드시 심판하시고 판단하시고 징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엄위하신 하나님’이시지만 그런데도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시고 용서하시고, 품에 안아주시고, 도와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엄위하신 하나님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동시에 느껴야 합니다.

1) 엘리후는 ‘하나님은 오묘하시다’라고 말합니다. (14)
‘오묘하다’는 ‘신비롭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신비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도 없고,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내가 하나님을 다 안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는 이단자들이나 잘못된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우리는 오묘하신 하나님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우리에게 성령님을 통해서 알려주십니다. 

한 가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은혜를 베푸시길 기뻐하시며 내가 평강 주시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 오묘하심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십니다.’

2) 엘리후는 ‘구름과 번개를 번쩍거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합니다.(15)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도 ‘구름과 번개’는 두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심판 주로 오시는 주님, 두려운 하나님, 무서운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쓸 때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구름과 번개’입니다. 
죄를 지은 자에게는 ‘하나님은 두려운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갈급해하는 자들에게는 두려움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나에게 한없는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단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입니다. 

3) 엘리후는 ‘인간은 하나님께 감히 고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20)
‘고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존재는 아니였습니다. 
‘죄인인 우리가 어떻게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감히 이야기할 수도,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 듣기를 기뻐하심’입니다. 
‘하나님 앞에 갈 수 없는 죄인이지만 예수그리스도의 보혈 피로 내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들으십니다.’
이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입니다. 
4) 엘리후는 ‘인간은 하나님을 볼 수 없다’라고 합니다. (21)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도덕적인 삶을 산다고 할지라도 인간과 하나님은 화목해질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죄’에 대해 여러 가지 변명을 늘어놓을 수도 있습니다만 인정해야 할 것은 우리는 ‘죄인’입니다. 아무리 떨어버리려고 해도, 죄는 끊임없이 우리의 삶에 붙어 있고, 우리의 품성도 틈만 나면 죄를 지으려고 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는 말씀에 우리는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늘 죄의 유혹과 사단의 유혹과 공중권세를 잡은 악한 영의 유혹에 끌려다닙니다. 
우리가 감히 쳐다 볼 수 없는 곳에서 우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할렐루야!

2. 엘리후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감추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시기에,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에게는 두려운 위엄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또한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시고 심판하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의 또 다른 속성은 ‘긍휼의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심판을 면한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심판만 강조한다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무조건 ‘심판’하십니다. 용서가 없으십니다. 절대 인간을 용서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긍휼하심’이 있습니다. 
그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나음을 얻었으며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엘리후는 욥에 대한 질투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욥에게는 ‘하나님의 위엄과 심판’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심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균형 잡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균형 잡힌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고 균형 잡힌 하나님을 속성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만 이야기 한다면 그것도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만 생각한다고 그것도 올바른 믿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판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한 미움과 질투는 하나님의 속성을 일방적으로만 적용하게 만듭니다. 
1) 하나님의 가장 큰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평안’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용서’입니다. ‘멸망이 아니라 회복’입니다. ‘저주가 아니라 축복’입니다. 
단 조건은 ‘하나님과의 화목’이었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자입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이는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이면서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심판의 하나님만 강조한다면 이느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엘리후가 ‘하나님을 잘 아는 것’ 같지만, 결코 그는 하나님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두려운 위엄만 강조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균형 잡힌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위엄이 있으신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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