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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사무엘상 4:1-11
종의 고백
우리는 살면서 간혹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질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왜 우리에게 실패가 있는 걸까요?”
여러분은 혹시 이러한 질문을 던진 사람들이 교회에 새로 등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새 가족이나, 이제 교회에 막 나오려고 하는 구도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더군다나 이런 종류의 질문은 하루아침에 잘 나가던 사업이 망해 길거리로 나 앉게 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도 아닙니다.
놀랍게도 이러한 질문은 오랫동안 교회에서 자라 교회와 자신의 삶을 분리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면서 나의 사랑하는 전우들이 이 험악한 전쟁에서 무려 사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합니까?”
사실 우리는 이러한 이스라엘 장로들의 불평 어린 질문을 듣고 적잖게 당황하게 됩니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아직 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철제로 중무장 된 주변국과의 전쟁에서 늘 피해의식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사 시대의 마지막 때를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주변국들과의 전쟁에서 어려움을 당할 때면,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은 사사를 통해 그들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뚜렷한 사사도 발견하지 못했고(물론 위대한 사사 사무엘이 있었음에도…), 강력하게 사용할 수 있는 철제무기로 무장돼 있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오래전부터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을 떠났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애굽과 가사 사이에 있는 기다란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넓게 퍼져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할 때, 가까운 블레셋 사람들의 길을 통과하지 않고 우회하여 광야 길로 향했습니다(출 13:17).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사사 시대를 맞았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그 힘을 키워 지중해 연안의 해안가로부터 점점 내륙으로 자신들의 세력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철로 만든 칼이나 창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블레셋 사람들이 철제무기나 철제 농기구를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범죄 할 때마다 블레셋이라는 주변 민족을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곤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싸우려고 에벤에셀에 진 치고 있었고, 블레셋은 아벡에 진 치고 있었습니다. 이 싸움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에게 패하여 무려 사 천명 가량의 군사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장로들은 다음과 같이 불평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그리고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은 여호와의 언약궤였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 계획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들은 군사들을 당시 성막이 세워져 있던 실로에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에서 가져왔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가져오는 이 중대한 일에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동참했습니다. 여호와의 언약궤가 이스라엘 진영에 들어온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이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승리는 우리 것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그들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여호와의 궤가 그들의 진영에 들어온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겠는가?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 인들을 친 신들이 아니냐.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대장부같이 나가 싸우라!”
블레셋 군사들은 더욱 힘을 얻어 이스라엘을 쳤고, 그 결과 무려 삼만 명의 이스라엘 보병들이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 군사들에게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승리를 보장해 주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가져다 놓고도 블레셋에게 대패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여호와의 언약궤가 가는 곳마다 승리가 보장되었던 것 아닌가요?
이러한 생각이 설득력이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이었습니다. 더 강한 신을 믿는 나라가 그렇지 못한 나라보다 전쟁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이 믿고 있던 여호와 하나님은 전쟁에 능하신 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다윗이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향해 외쳤던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사 17:45).”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블레셋마저 이스라엘의 신을 가리켜 ‘능한 신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켜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들을 친 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름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문제란 말입니까? 이스라엘이 그토록 전쟁에 능한 신을 모시고서도 블레셋에게 패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약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와 비슷한 일들이 일어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즘처럼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는 전쟁터가 따로 없습니다.
우리 자녀들은 대학입시라고 하는 심각한 전쟁터에 중무장한 군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은 비좁은 명문대학 입학이라고 하는 전쟁터에 내몰려 있습니다. 거기서는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보수가 많고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해마다 “입시 철이다, 취업시즌이다.”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사회의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나마 우리에게는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블레셋에게 패한 이스라엘 백성처럼, 만약 우리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라는 강력한 언약궤를 지니고도 인생 전쟁터에서 낙오했다면,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만 할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 우리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고 있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말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첫 번째 블레셋으로부터 큰 손실을 보고 난 후에 그들이 했던 말을 들어봅시다.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자(3절).”
이 짧은 문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단 한 번밖에 등장하지 않지만, “우리”라는 단어는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이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을 때, 여호와의 언약궤와 함께했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그들은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였습니다.
우리가 만약 사무엘상의 앞부분을 읽어 보았다면, 그들의 이름이 결코 명예롭지 못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들은 결코 명예로운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행실이 나쁜 일종의 불량배와 같은 사람들이었을 뿐입니다(삼상 2:12). 그래서 하나님은 이미 그들을 죽이기로 결정하셨습니다(삼상 3:25, 34).
더군다나 그들이 전쟁터에서 한 날에 죽었다는 소식과 여호와의 궤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그들의 아버지, 엘리 제사장마저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엄밀히 말씀드려서, 언약궤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이 모두 한결같이 축복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말고도 다른 사람이 더 있지요? 언약궤의 이동 경로를 따라가 볼까요?
이스라엘이 블레셋에게 패한 이후에 언약궤는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 신성한 언약궤를 아스돗(삼상 5:1)에 있던 다곤 신전에 소중히 모셔 두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다곤 신의 능력과 여호와의 능력이 합쳐져서 그들에게 더 많은 축복이 베풀어질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그들은 다곤의 얼굴이 땅바닥에 떨어져 여호와의 궤 앞에 엎드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또 그다음 날에는, 그들이 아예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 위에 놓여있고, 그 몸뚱이만 남아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아스돗에 있던 여호와의 궤가 가드(삼상 5:8)로, 가드에서 다시 에그론(삼상 5:10)으로 옮겨 다닌 지 무려 일곱 달이 지났습니다. 그사이 얼마나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는지 모릅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도 독한 종기에 걸려 고생을 해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시 이스라엘에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소 두 마리에 수레를 매게 하고, 그 위에 언약궤를 실려 보냈습니다.
언약궤가 이스라엘의 벧세메스에 도착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불행하게도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본 이유로 무려 오만 칠십 명의 사람들이 죽고 말았습니다(삼상 6:19).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 사건이 있는 후에, 기럇여아림 사람들이 언약궤를 아비나답의 집에 옮겨 놓았고, 그 아들 엘리아살을 제사장으로 세운 후에야 비로소 그 땅에 오랫동안 평안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저는 신중하게 이 본문의 중심 메시지를 다루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배의 대상이지, 우리가 함부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이나 처방책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입니다. 설사 우리가 그분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실 것입니다.
이러한 비 공유적인 하나님의 속성을 가리켜 신학자들은 ‘초월적인 하나님’이라고 표현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과 다르십니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지금도 이 땅을 다스리시고, 우리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해서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이런 초월적인 하나님이 우리 인간의 역사에 함께 하고 계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의 역사와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심지어는 죄인인 우리 속에도 거하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내재하시는 하나님’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너무나 초월하신 하나님도 아니고, 너무나 내재하신 하나님도 아니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이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교묘하게 뒤섞여 왔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였습니다.
출애굽기 25장 22절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궤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만나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나아갈 때,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언약궤 앞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영원한 진리입니다.
결국, 우리가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종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시고, 결코 수단이나 문제의 처방책이 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스라엘 장로들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언약궤를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한다거나,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언약궤 앞에서 주인행세를 했습니다. 그들은 마치 종을 시켜 “지금 당장 저 악한 블레셋 군사들을 멸하고 돌아오라!”라고 명령을 내리는 주인과 같이 행세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것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무서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무서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간절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부탁할 수는 있지만, 그 누구도 하나님을 상대해서 명령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행동은 망령된 것이고,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하는 행위입니다.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에서 흔히 보았던 신상과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더군다나 여호와의 언약궤는 어떤 전쟁에서도 우리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전쟁의 수호신’(war palladium)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잘못을 해도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대중 넘어가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애초부터 언약궤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사사기 20장 27절에 보면, 이스라엘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물으니라. 그때에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거기 있었고”
이스라엘 자손이 전쟁에 나가기 전에 과연 전쟁에 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를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말입니다.
사무엘상 7장에 보면, 사무엘이 블레셋과의 전쟁에 나가기 전에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스바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들은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붓고 온종일 금식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게 하소서(삼상 7:8).”
이 말은 블레셋 군사들이 자기들을 치러 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겁에 질려 한 말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하나님께 온전한 번제를 드리고 이스라엘을 위하여 부르짖으매,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큰 우레를 발하여 블레셋 군사들을 패배하게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여호와의 언약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를 주십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언약궤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우할 때만 말입니다.
그들이 언약궤 앞에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날 때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때, 하나님이 그들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 되십니다. 그러나 전장으로 달려가는 구급차처럼, 우리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언약궤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언약궤는 우리에게 더 큰 실패와 좌절을 안겨 줄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아브라함 링컨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편인지, 아닌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내가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My concern is not whether God is on our side. My greatest concern is to be on God’s side.)
저는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다윗 이야기를 해드리려고 합니다. 다윗의 인생 말년에 어려운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피난살이를 해야 했던 겁니다.
다윗이 왕궁을 빠져나가던 날, 제사장 사독과 레위 인들이 다윗의 장막에 있던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고 다윗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다윗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을 것입니다.
“다윗 왕이시여! 왕께서 분명 여호와의 궤를 가지고 가시면 당신이 가는 길에 승리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백성들의 마음이 왕을 절대로 떠나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 다윗 왕이 정색을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궤를 성읍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가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지 않겠느냐? 그러나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할 것이다(삼하 15:25).”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자신을 가리켜 ‘종’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맡겼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자신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는가 하더라도, 자신은 그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의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혹시 재를 뒤집어쓰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나는 주의 종입니다! 당신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여러분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다윗이 이런 놀라운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다윗은 선지자로서 이 세상 가장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을 미리 바라보았던 것이 아닐까요? 그는 어쩌면 요한계시록 11장 19절의 하늘 성전을 바라보았던 것은 아닐까요?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우레와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지금 이 세상에는 여호와의 언약궤가 없습니다. 아마 그것이 있었다면 성지순례를 통해서 먹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이용해서 엄청난 돈을 벌었을 겁니다.
주님이 오시기 약 600년 전, 솔로몬이 지었던 예루살렘 성전이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함락되면서부터, 여호와의 법궤는 이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음의 성전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주의 종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있는 자신의 성전을 열어,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를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이것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분명히 일어날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을 여러분의 도구로 삼지 마세요! 하나님을 여러분의 삶의 목적으로 삼으세요! 날마다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나아가 그분을 만나십시오. 그리고 겸손히 그분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저는 여러분이 다윗처럼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당신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 고백을 드릴 수 있다면, 분명 여러분의 앞날에 형통함이 있고, 승리가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승리를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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