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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어떠한 믿음입니까?
(눅 17:12-19)
믿음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위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자신의 의지와 열정에 의한 믿음입니다.
먼저 후자의 경우를 살펴보자면 여기에는 뚜렷한 목적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믿음에 있어서 가장 우선 순위는 어떻게 해서든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니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믿음에는 언제나 자신의 의지와 열정이 빠지지 않는데, 문제는 그것이 더 크기에 마치 의지와 열정 자체가 믿음 처럼 보인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중,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위치한 어느 마을을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 마을을 지나가심은 단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이어서만이 아니라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적은 바로 만남에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 만나러 오시지 않는다면 아무리 의지가 강하고 열정이 뜨거울 지라도 그것은 헛수고 일 뿐 입니다.
주님은 이 마을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기에 들어가셨고 만나야 할 사람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열 명의 문둥병자들입니다.
마을에 들어가신 주님은 멀리서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님을 향해 외치는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살고있는 마을을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이 자신들과 같은 문둥병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나와 있다가 예수님을 보고는 멀리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외친 것입니다.
하지만, 현재 이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믿는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자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과 소식이 그들에게 희망을 주었고 기대감을 갖게 하였으며, 예수님이 자신의 병을 고쳐주실것 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그 강한 기대감과 확신은 문둥병자이기에 절대로 길을 돌아다녀서는 안 됨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라도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목까지 나와 예수님을 만나도록 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들이 지금 예수님을 만나러 나온 것은 예수님의 존재를 믿는 믿음에서라기 보다는 이 지긋 지긋한 병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강한 의지와 예수님을 만나 고침을 받겠다는 확고한 목적이 있었기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온전한 믿음에 앞서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했습니다(롬10:17).
그리고 그들은 지금까지 들어온 것을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제 들음으로 나게 된 믿음이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순간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마을을 지나가시는 예수님께 나온 것이 자신들이 가진 의지와 목적에 의해서 이건 아니면 그동안 들어온 것에 대한 작은 씨앗과 같은 믿음 때문 이건 간에 중요한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목적때문에 나왔느냐? 아니면 믿음이 있기에 나왔느냐? 를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한 바가 있어 자신의 강한 의지로 주님 앞에 서게 되었든지, 아니면 정말 보잘 것 없다 여기는 믿음으로 서 있든지, 공통점은 주님에 대해 들었기에 들음으로 이 자리에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들음으로 서게 되었다면 이제는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온전해지고 견고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문둥병자들, 그들이 주님 앞에 서 있습니다.
각자가 어떠한 쪽으로 이끌림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들음에 의하여 예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저 멀리 서 예수님을 향해 소리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들의 외침을 보더라도 아직까지 그들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닌 자신들의 목적이 보다 앞서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들어왔던 예수님에 대해서 "주님" 이라는 고백이 아닌 "예수 선생님" 이라는 호칭이 익숙했던 것입니다.
아직까지 믿음에 대한 그들의 들음이 확고하지는 않았기에...
이에 주님은 들음에서 난 그들의 믿음을 더욱 확고히 세우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저는 말씀 드리기를 아마도 예수님을 만나러 온 그들은 믿음 보다는 목적한 바를 이루고자하는 의지가 더 강하기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이 순간 주님의 말씀을 납득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정말 간절함으로 주님을 향해 소원을 빌 듯 소리쳤습니다.
"예수 선생이님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그런데 기껏 돌아 온 대답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가 다 입니다.
목적한 바가 큰 만큼 그들의 기대 역시 컸을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그동안 들어왔던 이야기들도 있었기에...
직접 일일이 안수하시며 고쳐주시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내가 원하노니 나을지어다' 라는 말씀을 기대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이 고치시고 치유하심에 따르는 절대적인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입니다.
전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은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주님이 베푸시는 기적만 보기를 바라는 것일 뿐 입니다.
많은 이들이 주님이 표적을 보여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하신것과 같습니다.
자신들의 간절한 간구에 대한 주님의 답변은 너무도 어의가 없을 정도로 짧고 단순합니다.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아마 그들에게 지금 놀라운 일은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가던 중 자신들의 병이 낫고 깨끗해졌다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간절한 자신들의 바램과 간구에 이해 못 할 답변을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그들이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열 명 모두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으로 그 말씀을 따른 것인지, 아니면 어의가 없지만 그래도 하라고 하시는대로 한 것 뿐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들음에서 나게 된 믿음을 온전케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따르는 순간 그들이 간절히 원하던 바램은 이미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러나 성경은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아주 명확히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가다가 깨끗함을 입은, 곧 문둥병이 나았던 열 명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이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모습을 보십시오.
지금 얼마나 놀랍고 기쁘고 감격스러운 상황입니까?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나머지 아홉 명의 병자들은 그 놀라움과 감격에 기뻐하며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너무나도 확실히 이루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갈 길을 가기 위해서...
그러나 그들도 왜 나름대로 주님께 감사하지 않겠습니까?
감사하면서 각자 자신들의 길로 갔습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여기까지가 그들의 믿음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믿음의 한계를 정한 꼴이 된 것입니다.
들음에서 나게 된 믿음을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고 그래서 더 온전하게 할 수 있는 믿음을, 그들은 또 다시 목적한 바를 반드시 이루기 위한 강한 의지와 열정속에 묻어 놓는 안타까운 길을 가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단 한 사람만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가던 중에 깨끗해진 자신의 모습에 그도 놀라움과 감격과 기쁨이 가득했지만, 말씀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길을 택했습니다.
감격과 기쁨에 소리치기 보다는,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이 순간 다시 돌아오는 길이 뭐가 그리 어렵겠느냐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솔직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아버지를 떠났던 탕자가 돌아오는 것이, 늘 아버지 곁에 있던 첫째가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 보다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사람은 기쁨 가운데서보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더 찾고 그 앞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돌아온다는 것은 평안 보다는 고난 속에 있을 때 입니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 늘 고난을 받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돌아 온 한 사람.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주님 앞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주님이 마을에 들어가신 목적은 만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멀리서 외치시기만 하는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주님은 만나야 할 사람을 그 자리에서 만나셨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나머지 아홉 명이 다시 돌아오지 않음으로 만나지 못 하심을 아쉬워 하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열 명의 문둥 병자들은 주님과 멀찍이 떨어진 거리에서 자신들의 바램을 이야기했고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다시 돌아 온 한 사람만이 지금 주님 앞에 무릎꿇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에 주님은 그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은 다시 돌아와 그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를 향해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들음으로 난 믿음이 주님의 말씀으로 말미암고 주님 앞에서 온전케 되는 순간입니다.
또한 주님은 그것이 그 사람의 믿음일 뿐 아니라 그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되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어쩌면 아홉 명은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갔기에 오히려 제사장에게로 간 그들의 길이 믿음의 길이라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 그것을 믿음이라 여긴 것인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또 많은 교회들도 말씀에 따른 아홉 명의 모습과 같이 제사장에게 가 보이는 것이 목적이자 믿음이라 여기고 속히 가기에 바쁩니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은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돌아왔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이 가진 믿음, 생각, 알고있는 지식 심지어 자신의 신앙까지, 그 모든 것보다 그저 주님이 좋고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에게 보이기 전에 먼저 주님을 만나기 위해 주님만 바라보며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나머지 아홉 명은 멀리 떨어진 곳에 서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이 알고 있는 믿음으로 행한 것이 다 이지만, 주님께로 온 한 사람은 그 앞에 무릎꿇고 주님께로 부터 참 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게되고 그 믿음으로 인한 구원의 선포를 들었습니다.
오늘 날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배우고 알고있는 믿음을 이야기하며
오늘 여러분은 어떠한 믿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혹 기쁨과 감격 속에 자신의 길로 간 아홉 명의 사람들 처럼 믿음의 한계를 스스로 정하고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믿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들음에서 시작된 여러분의 믿음은 분명 주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것으로 족하다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렇기때문에 다시 주님 앞으로 나와 주님 앞에 무릎꿇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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