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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편143:8)■
(데살로니가후서 1장 4절)
''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은혜"는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입니다. 그런데 이 용어가 만들어지게 된 유래가 특이합니다. 청명한 정오에 잔잔한 호수 위에 비취는 태양의 빛을 보고 카리스라 명명했답니다. 물론 성경 저자들은 이 용어를 채택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게 베푸신 은혜 혹은 은총으로 적용했답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단어가 단독으로 사용될 때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제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한정 짓거나 서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 주님의 은혜, 부모님의 은혜, 스승의 은혜 등과 같이 은혜의 준거를 명확하게 명시할 때는 주어가 속격을 취합니다. 이는 은혜의 출처를 분명히 함과 동시에 속격을 취한 주어에 따라서 은혜의 성격과 의미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카리스'라는 단어가 탄생된 상태를 연상해 보세요. 특히 요즘 같은 장마철에는 호수 주변이 어떤 상황일지 그려 보시고 장마철이 끝나고 난 이후의 호수 주변도 상상해 보시면 보다 입체적일 것 같네요. 제 경우에는 말라기 4장 2절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라고 하신 말씀이 제일 먼저 떠올랐답니다.
오늘 묵상할 말씀은 데살로니가 전서에서 그릇된 재림관과 종말관에 미혹되어 도덕적으로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던 교회를 교리적으로 권고했으나 이해의 한계를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던 상황을 고려하여 다시 두 번째 편지를 쓰되 보다 더 강화된 어조로 훈계한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그러므로"는 우선 바울이 데살로니가 전도 사역 당시에 겪었던 고난과 핍박이 바울 일행이 떠난 후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인내와 믿음으로 잘 극복하고 있었던 데살로니가 교회이기에 여러 교회에 자랑한다는 격려의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환난(θλίψεσιν, 들맆세신)"은 일반적으로 어떤 시련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고통을 의미하고, "핍박(διωγμοίς, 디오그모이스)"은 그야말로 그리스도를 신앙한다는 이유 하나로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압박이나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를 참고 인내한다는 것은 현재 시상으로 환난이나 핍박이 과거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지나간 상황 종결적 의미가 아니라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그 순간에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던 상황이었음이 강조되는 용법입니다. 이는 불신이 팽배한 세상에서 교회나 성도가 겪는 핍박은 불가피함을 시사한 것입니다.
결국 성도는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기도 하고 옥에 갇히기도 하고 내적인 고민과 슬픔, 혹은 걱정과 두려움에 노출되기도 합니다. 우리 성도는 때때로 자신의 잘못 때문에 겪는 애매한 고난이 따를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로 당하는 고난은 상급이 따르므로 유익합니다.
고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를 통해서 믿음이 연단되고, 연단된 믿음은 더욱 큰 소망을 갖게 되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여기 "인내(υπομονής, 휘포모네스)"는 전혀 견뎌낼 수 없는 상황임에도 끝까지 참아내되 그냥 수동적인 자세로 거의 체념 상태에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는 목표가 분명하게 서 있는 자에게 해당되는 용어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자들이 가진 믿음과 깊은 관계를 지닌 덕목이요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상태론적으로 정확한 푯대를 바라보고 마치 용맹스러운 군인처럼 강건하게 서서 버틸 뿐만 아니라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진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세와 여호수아에게 동일하게 "강하고 담대하라"라고 명령하신 내용과 맥을 같이 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러므로"에 담아낸 데살로니가 교회의 자랑거리를 강하게 어필함으로써 당시 극한 환난과 핍박과 거짓 교사들의 회유 가운데서도 끝까지 믿음을 굳게 지키고 있는 성도들이 아가야 지방 교회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음을 칭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우리도 데살로니가 교회가 귀감이 되어 주었던 극한 환난과 박해 가운데서의 인내를 배우고 답습하여 믿음의 본질론에 충실하고 신실한 교회의 기둥들이 되도록 사모의 고개를 들어야 하겠습니다. 무기력하게 현대 문화에 굴복되어 '그래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정당화 하는 굴욕은 절대 사양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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