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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형제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십시오!'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7-15 04:00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고린도후서 1:15~2:4
형제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십시오.

로스 박사가 공저한 「인생 수업」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어느 날 로스 박사가 뉴욕에서 1,500명의 청중 앞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자 수백 명이 그의 책을 사서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습니다. 로스 박사는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사인을 해주고 싶었지만, 공항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가까워져서 몇 사람에게 더 사인을 해주고 나서 서둘러 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허둥지둥 공항으로 달려가 청사 안으로 들어가니, 비행기 출발이 15분 지연되었습니다. 다행히 출발이 늦춰지는 바람에 로스 박사는 꾹 참아왔던 볼일을 보러 화장실에 갈 수 있었습니다.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막 볼일을 보려던 참에 누군가가 밖에서 말을 걸었습니다.

“로스 박사님, 괜찮으시다면…” 그녀는 ‘무슨 일이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녀가 쓴 책 한 권이 펜과 함께 화장실 문 아래 틈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녀는 “아뇨, 안 괜찮은데요”라고 말하면서도 무심코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화가 나서 화장실에서 나가기 전까지 시간을 더 끌 수도 있었지만, 빨리 볼일을 봐야 하고, 또 이런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궁금했습니다. 볼일을 보고 엄청 화 난 얼굴로 밖으로 나가 보니 뜻밖에도 수녀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로스 박사는 그녀에게 별로 다정하지 않은 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어떻게 화장실에서 제대로 볼 일도 못 보게 방해할 수 있죠?”라는 말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습니다.

사실 로스 박사는 그 상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이 여자는 왜 이런 식으로 화장실에까지 와서 나를 가로막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344097619076136&id=100004277616324

만약 여러분이 로스 박사였다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오늘 본문에도 바울의 마음을 얹잖게 하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고린도 교회에 속한 일부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마음을 얹잖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근심하게 한 자(5절)”였습니다. 바울과 그들의 갈등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 것은 바울의 방문계획과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두 번씩이나 방문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려 했던 목적은 그들에게 은혜를 끼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에베소에 머물러 있던 바울은 고린도를 방문한 후에 마게도냐로 갔다가, 다시 마게도냐에서 고린도로 내려가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유대로 가고자 계획하였습니다(15-16절).

그러나 바울은 이러한 계획을 바꾸어, 오순절까지 에베소에 머물러 있기로 했습니다. 이후 바울은 마게도냐를 지나 고린도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이후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도움을 받아 유대로 가고자 계획을 수정하였습니다(고전 16:5-9).

대신 바울은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고린도전서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보낸 후에도, 교회의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이때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면서 고린도전서를 보낸 결과를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로부터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갑작스럽게 고린도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때가 바울의 두 번째 고린도 교회 방문이었습니다. 바울의 두 번째 방문은 ‘근심 중에 나아간 방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직접적인 방문으로도 고린도 교회의 상황이 나아지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두 번째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한 성도로부터 혹독한 비난과 모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비난과 모욕을 준 성도를 가리켜 “근심하게 한 자(5절)”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 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2:5-6).”

두 번째 고린도 교회 방문을 마치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다시는 그들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않기로 결심(2:1)”하였습니다. 대신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세 번째 편지를 눈물로 써서 보냈습니다.

다행히 바울이 보낸 편지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서, 일부 성도들이 자신들의 악한 행위를 돌이키게 되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위로를 얻고, 네 번째 편지인 고린도후서를 써서 그들에게 보내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이 자주 수정되자,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이 믿을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자신이 이렇게 계획을 세울 때 어찌 경솔히 하였겠느냐고 반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들에게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을 변경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바울이 에베소에 머무는 동안 큰 환난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다(1:8-9).”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고린도 교회 안에는 바울이 변덕스럽다며 바울을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겉으로는 “예, 예” 하면서 사람들의 비유를 맞추다가도, 속으로는 “아니라, 아니라” 하면서 자기의 유익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하는 나쁜 사람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성품에 기초하였습니다(18절).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가 “아니요”로 바뀐 적이 없었습니다. 그 안에는 오직 “예”만 있을 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바울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한 말은 “예”가 “아니오”로 된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해야 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나 성도들을 돌보는 목양자, 그리고 교회의 중직을 맡아 봉사하는 중직 자들은 자신의 인격과 삶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바울이 오해를 받았듯이, 우리도 때로는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바울처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라(12절)”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혹 사람들이 우리를 부분적으로 알고 판단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불평하거나 낙심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던 것들이 완전히 밝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같은 소망과 신뢰로 사람들에게서 받는 모든 오해와 비난을 이겨내야 합니다.

바울은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19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하나님의 뜻에 “아니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심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성부 하나님의 말씀에 “예”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말로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행하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 4절에서,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마치신 후, 운명하실 때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울이 고린도 교회 방문계획을 변경했던 또 다른 이유는 없었을까요? 바울은 23절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목숨을 걸고 하나님을 증언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울이 그들을 아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두 번째 방문했을 때, 교회 안에서 바울의 대적자들과 바울의 옹호자들 사이에 서로 다툼이 일어났던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바울이 그런 상황을 알면서도 다시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다면, 교회 내의 갈등이 더 커질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여 그들과 교제하는 기쁨을 뒤로 미루고, 성령께서 교회를 하나로 만들어주실 때까지 기다리며, 그 상황을 하나님께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바울이 이러한 결심을 하기 까지는 많은 고뇌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간혹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남의 유익보다 나의 유익을 앞세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먼저 구합니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이 나의 사랑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이와 같은 결심을 하게 된 배경에는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습니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24절).”

바울은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가 성도들의 믿음을 주관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성도들의 기쁨을 돕는 자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나는 믿음이 있고, 너는 믿음이 없기에 너는 나의 말을 따라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자세를 갖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도 모르게 지나친 영적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겸손하게 자신은 타인의 기쁨을 돕는 자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바울은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24절)”고 말함으로써,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모습에서 자신의 권위를 주장하거나, 타인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자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항상 타인의 유익을 구했습니다. 심지어 기도하고 신중하게 세웠던 계획을 변경하면서까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마음이 열려 자신을 받아줄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성령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조금 더 기다려야 할 부분은 없습니까?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구호 가운데 “기도보다 성령보다 앞서지 말자!”라는 구호가 있습니다. 우리가 자칫 기도하지 않고 성령보다 앞서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특별히 인간관계에 위기가 찾아왔을 때 여러분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여러분은 공항 화장실에까지 찾아와 사인을 부탁했던 한 수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의 불편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수녀는 로스 박사에게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제 동료 수녀가 지금 병상에서 죽어가고 있어요. 그녀는 박사님의 강연 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너무나도 오고 싶어 했지만, 몸이 아파서 올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녀를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박사님의 강연을 대신 듣고 녹음을 하고, 또 박사님이 친필로 사인하신 책을 선물하려고 했어요. 그것이 친구에게 얼마나 소중한 마지막 선물이 될지 알기 때문에 저는 한 시간 넘게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그런데 제 앞으로 몇 사람 남지 않았을 때 박사님은 공항으로 떠나셔야만 했어요. 박사님의 사인을 받기 위해 제힘이 닿는 한도 내에서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도 안타깝게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요. 하지만 박사님이 여기에 들어오시는 걸 보는 순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왜 이 난처한 상황을 그렇게 말했는지 이제는 이해하시겠어요? 이 우주가 박사님과 저를 같은 공항 같은 비행기로 이끌었고, 같은 시각에 같은 화장실로 인도한 셈이잖아요?”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2344097619076136&id=100004277616324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처음에 수녀에게 가졌던 불편한 마음이 해소되셨습니까? 우리는 상대방의 상황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마음에 불편함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마음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그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그들이 바울의 진심을 이해한다면,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자신의 소중한 가족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상대방의 진심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겪게 되는 갈등이 꼭 불필요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갈등으로 인해 우리 공동체가 더욱 단단하게 결속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열린교회를 시무하는 김남준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의 아버님이 한국전쟁 때 다리에 총알이 박혀 뼈를 다치셨다고 합니다. 다행히 뛰어난 수술 실력을 지닌 군의관 덕분에 다리를 자르지 않고 수술로 으스러진 뼈를 연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다리가 부서지면 어쩌나 걱정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은 “아버지, 뛰거나 넘어지면 그때 부러진 곳이 다시 부러지지 않나요?”라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아버지는 자신의 다리에 아들의 손을 갖다 대시더랍니다.

아들이 만져보니, 뼈가 가지런히 내려오다가 유독 부러진 부분에서 더욱 두터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부러졌던 다리가 치유 과정을 거치면서 뼈를 구성하는 물질이 더욱 많이 생성되어 오히려 다른 뼈보다 더욱 튼튼하게 자리를 잡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도저히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왔을 때, 그 관계를 깨지 않고 지혜롭게 위기를 극복하면 오히려 시간이 지나 그 위기가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시선이 자신의 상처와 나에게 상처를 남긴 사람만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가 나에게 이런 아픈 상처를 남겼으니 네가 잘 되나 두고 봐라. 나도 언젠가는 너에게 당한 만큼 갚을 날이 있을 게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시선이 우리를 용서해 주신 하나님을 주목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상처를 남긴 원수 같은 사람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출처: 김남준, 「개념 없음」(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1); 「생명의 삶」(서울: 두란노, 2018년 3월호), p. 41에서 재인용.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미워한 것도 아니고, 바울 스스로 좌절해서 낙심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계획을 내려놓고 철저히 성령께 맡기며 드로아를 거쳐 다음 사역지 인 마게도냐 지방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바울의 부탁을 받고 고린도 교회를 방문하였던 디도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바울을 만나기 위해 마게도냐로 찾아왔습니다. 바울이 디도를 통해 들은 소식은 바울에게 큰 위로가 되었는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행했던 잘못했던 일들을 뉘우치고, 드디어 바울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여전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사모하고 있으며, 바울의 사역을 협력하는 일에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디도의 보고를 듣고 바울은 큰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7:7).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충성할 때가 있으며, 성령님께 맡기고 기다릴 때가 있는 것입니다. 어디 하루아침에 교회가 세워집니까? 마치 농사꾼이 열매를 얻기 위해 봄에 씨앗을 심은 후에, 꾸준히 물주고, 잡초를 뽑아주며 가을까지 기다려 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풍성한 알곡을 거둘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가정이나 교회 생활도 일정한 부분, 기다려 주어야만 하는 영역이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일수록 오랜 기다림이 필요한 것입니다.

혹시 주변에서 함께 열심히 신앙 생활하다가 갑자기 시험에 들거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교회를 못 나오는 사람이 있더라도, 우리가 “왜 이 사람이 안 나오나?”, “이 사람 믿음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라고 쉽사리 그를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히려 “무슨 사정이 있겠지. 내가 더 사랑해 주고, 더 기도해 주고, 더 기다려 주면 언젠가는 성령께서 이 사람을 감동하셔서 함께 신앙 생활하는 기쁨과 복을 누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그를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해 주고,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 주는 것도 사랑입니다. 누구나 인생에는 굴곡이 있기 마련이고, 시험이 없는 신앙생활은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의 믿음을 주관하려 하기 보다는 다른 사람의 기쁨을 돕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믿음을 인정해 주십시오. 그리고 성령님께 그를 맡기고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가 너희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이 아니요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 이는 너희가 믿음에 섰음이라(24절).”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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