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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저지 빛교회 김희건 목사, Ph.D./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요셉
창세기 새벽 강해를 하면서 요셉의 삶에 대해 읽게 되었다. 성경은 어떤 사람을 미화시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에 대해서는 그의 허물에 대한 언급이 없다. 혹 어떤 분은 요셉이 형제들의 비리를 아버지 야곱에게 고한 것이 고자질 아닌가 묻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 입장에서는 자녀들의 실상을 아는 일이 우선적이다. 요셉의 보고가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고, 야곱에게 사실을 전해 주었기 때문에, 그걸 비방이라 말하기 어렵다.
요셉이 두 번 꿈을 꾸고 꿈 얘기를 형제들이나, 아버지에게 말한 것은 자기를 높이는 마음, 우쭐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물을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이 형제들 사이에 높임을 받고, 또 부모가 요셉에게 절하는 꿈은 형제나 부모가 듣기 거북한 내용일 것이다.
하나님은 요셉을 귀하게 사용할 계획이 있어 두 번씩 꿈으로 계시하셨다. 문제는 그 꿈을 형제들이나, 아버지에게 발설하는 것이 신중한 일인가, 묻게 된다. 하나님의 계시를 숨기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었을까? 아니면 핍박을 무릎쓰고 발성하는 것이 옳았을까? 해석하는 이에 따라 달리 설명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타락한 인간의 심성을 건드리고 반항하는 마음을 일깨운다고 종교 개혁자 루터는 말한다. "하나님 나라(The Kingdom of God)"이라는 책에서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요 신학자 로이드 존스는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사실 그대로 전한다면, 사람들은 발끈하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비유로 전했다고 말한다. 아직 그의 죽음의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육신의 마음을 찌르고 책망한다. 사람 듣기에 달콤한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심령, 골수를 찌르고 쪼갠다고 한다. 그러나 구원받을 사람은 회개하는 마음으로 복음에 응답하고, 심판 받을 사람들은 대적하려 한다. 베드로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은 회개를 통해 구원에 이르렀고, 스데반의 설교를 들었던 유대인들은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였다. 그 사건 이후, 구원이 유대인을 떠나게 되었다.
요셉이 꿈에 대해 말한 것은 천진난만한 말이라기 보다는 핍박을 각오한 말이 아닐까, 싶다. 예수님도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계시함으로 핍박을 자초하셨다. 요셉은 그 꿈을 발설하였을뿐 아니라, 형제들의 시기와 미움,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침묵으로 수용하였다. 거기서 그의 위인 됨을 보게 된다. 억울하고 괴로울 때, 침묵으로 그 상황을 수용한다는 것은 대단한 믿음의 표현이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만이 억울한 일을 당해도 침묵으로 수용한다. 하나님의 섭리와 구원을 믿기 때문이다.
요셉은 사람을 구원할 자가 가는 길을 앞서 보여 준다. 하나님의 계시를 믿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힘들고 괴로운 길을 믿음으로 순응하고 따라가는 것이다. 거기 초조함이 없고, 그 삶의 자리, 힘들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즐기고 형통하는 삶을 살았다. 오늘 현재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고, 다른 사람을 구원하는 사람으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을 증거한다. 그를 구약 속의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당한 표현이라 생각한다.
하루 하루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그가 인도하시는 길을 침묵으로 따라가는 사람, 하나님의 임재 속에 사는 사람은 자기를 구원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생명으로 인도하기에 합당한 사람이다. 우리는 어떤 마음, 어떤 감성으로 하루를 살고 있을까, 돌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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