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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감리교회 김진구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주님과 함께 날마다 경험하는 이방인의 삶>
여자 : 당신, 나 사랑해?
남자 : 내가 너를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그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야.
여자 : (...) 나랑 결혼할래?
남자 : 네가 원하면 그럴께. 그러나 내가 너와 결혼하기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그것 역시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야.
현실의 부조리함과 관습에 묶여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드러낸 실존주의 문학의 거장 알버트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 '뫼르소'와 그의 연인 '마리'의 대화 내용입니다.
카뮈의 소설은 조금 어렵습니다. 내가 여기에서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의 소설이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의 소설 '이방인'(The Stranger)에 나오는 뫼르소의 언어처럼 그의 소설어법 역시 플롯 중심의 일반 소설에 익숙한 자들에게는 매우 독특하게 느껴지고 또한 낯설게 느껴지는 '이방인의 어법'입니다.
'이방인'이란 누구인가? 이방인은 한 마디로 보통사람들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감정과 본능에 매우 충실하며 자신의 말과 생각을 아름답게 포장하지도 못하고, 좀 더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삶의 방식을 가진 '뫼르소'는 소설을 읽는 우리들에게도 매우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버트 카뮈의 소설 '이방인'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엄마의 죽음에도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는 뫼르소, 심지어 엄마의 장례식을 치른 그 다음날 애인과 함께 해변가로 가서 실컷 즐기는 뫼르고, 그리고 단지 햇볕때문에 살인까지 저지른 그 뫼르소가 친근하게 느껴지고, 오히려 그를 이방인 취급하는 이들이 이방인처럼 여겨지는 이 느낌은 또 뭘까? 혹시 우리들도 여전히 우리들의 감정이나 생각과 다른 수많은 '이방인들'이 살아가는 이 부조리한 세상에서 날마다 또 힘겹게 살아내야 하는 또 다른 차원의 '이방인들'이기 때문은 아닐까?
알버트 까뮈는 그의 소설 '이방인'을 통해서 적절하게 현실과 타협하며 관습을 따라 살아가야 할 이 땅의 사람들 속에 있는 부조리한 모습을 치열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도 역시 모두에게는 아니지만 여전히 지금도 그의 소설을 읽기를 힘들어 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이방인' 취급을 받고 있기도 한 것 같습니다.
알버트 카뮈의 소설 '이방인'속의 주인공 뫼르소처럼 본능에 충실하지도 않았고, 사람을 죽이지도 않았지만 역시 이 땅에서 철저히 '이방인' 취급을 받았던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바로 2000년 전에 유대 땅의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분을 내 삶의 '주님'으로 인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살아계신 우리 주 아버지 하나님' 즉 온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고백하면서 이 땅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아갈 것을 결단하며 살아가는 자들이기도 합니다.
이방인 '뫼르소'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들의 삶이 철저히 구별되는 것은 이방인 뫼르소는 자신의 본능에 충실한 삶을 살았지만 우리들은 자신의 본능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충실했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오늘도 성령충만함 속에서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서 본능과 치열하게 싸우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또 우리들은 여전히 본능에 충실한 사람들에게도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날마다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먹을 것만 주면 꼬리를 흔들고, 막대기를 휘두르며 화를 내면 주눅이 들어 슬금슬금 피하기도 하는 강아지처럼 본능에 충실한 삶이 '진실한 삶'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악한 영에 사로잡힌 인간의 본능, 그 본능 역시 우리들의 실제적 삶인 우리 영혼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우리들의 소리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거짓의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철저하게 그 거짓의 소리를 거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서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 위에 던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오늘도 우리들을 이렇게 초청하며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막 8:34) 그리고 주님도 친히 그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기 위해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 6:38) "다 이루었다."(요 19:30)
십자가의 삶은 날마다 내가 죽어 그리스도로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한 후,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기로 결단한 우리들은 이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날마다 이 땅에서 철저히 외면 당하고 버림을 받으며 죽임을 당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어서 다시 사는 삶의 선택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고, 십자가의 능력이기도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쉽게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여전히 이미 하나님의 나라로부터는 철저히 '이방인'으로 살아가던 이 땅의 삶에 익숙한 '자신으로부터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은 아닐까요? 과연 어떤 삶이 참된 삶이고 풍성한 삶일까요? 하나님 없이 자기 본능대로 살아가며 부조리한 이 세상에서 적절히 타협하고, 자기를 맞추며 만족하는 삶이 참되고 풍성한 삶일까요? 아니면 철저히 이 땅의 삶을 부정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옳곧게 말씀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되고 풍성한 삶일까요?
오늘도 나는 성령충만함을 갈망하며 이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하늘의 기쁨을 소망합니다. 우리 함께, 또 다시 이 행복하고 풍성한 삶을 위하여 이 영광된 십자가의 길을 힘차게 걸어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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