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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 두 증인의 승천과 일곱 번째 나팔(요한계시록 11:11∼19)
[1]
두 증인이 죽임당한 곳은 큰 도시이며, 영적으로 “소돔 또는 이집트”라고 했는데,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이라고 했으니 예루살렘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예루살렘이 예언의 영을 통해 영적으로는 소돔ㆍ이집트라고 불림으로써 심판이 임박한 도시란 성격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소돔은 롯이 살기에 극히 괴로웠던 곳입니다. 극심한 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 때 이걸 피하려고 롯은 다른 곳으로 도망갔습니다. 이집트는 하나님의 백성인 히브리민족을 괴롭혔던 국가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대적해 죽인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소돔ㆍ이집트ㆍ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주님의 백성에게 적대적인 장소인데, 저들이 벌인 행위에는 음란과 우상숭배가 있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음란은 우상숭배의 결과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음란보다 우상숭배에 방점을 찍습니다. 음란이 우상숭배를 불러온 게 아니라 우상숭배가 음란을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특정한 우상을 숭배하지 않더라도 인간의 삶에 얽힌 선악 판단을 자기가 결정하는 우상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선악을 결정하는 일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보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신념을 우선하면 성경적으로는 그게 우상이 됩니다.
[2]
길거리에 나둥그러져 있는 두 증인의 시체를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보고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저들을 괴롭혔던 두 증인 죽었기에 저들은 기쁨에 겨워 서로에게 선물까지 보냈습니다(10절). 사람이 죽었는데 그걸 기뻐하기 위해 선물까지 보내는 게 참 괴이한 풍경입니다. 두 증인은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한 사람들인데 요한은 이들을 “두 예언자”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표현함으로써 그는 교회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선지자적 예언 활동이라고 했습니다. 두 증인의 사역으로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괴로워했다는 건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두 예언자가 증언한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를 싫어했다는 말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숨겨진 죄를 드러내 회개하라고 촉구하고,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에게 삶의 가치를 이 나라에 맞춰 새롭게 정립하라고 합니다(요한복음 16:8). 그러나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은 복음으로 인해 드러난 죄를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맞춰 삶을 새롭게 정립하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해 아래 세상만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3]
두 증인은 3일 반 만에 생명의 영이 하나님으로부터 이들에게로 들어가서 제 발로 서서 다닐 수 있게 됐고, 이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3일 반이라는 숫자를 통해 요한은 두 증인의 사역과 죽음이 예수님의 본을 따른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걸 확장하면 3년 반이라는 예수님의 지상 사역 기간과 연계되는데, 이는 앞부분에서 서술한 것처럼 모세ㆍ엘리야가 하나님의 왕권을 대행했던 기간입니다. 3일 반은 두 증인이 죽어지내는 기간이므로 악인들의 축제 기간인데, 이 기간에 두 증인은 수치와 모욕을 당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들로 인해 괴로워했던 땅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했습니다. 여기서 두 증인이 증언 사역을 통해 누렸던 영광의 기간과 수치와 모욕을 당했던 기간이 대조를 이룹니다. 영광은 3년 반이지만 수치와 모욕은 3일 반입니다. 이처럼 짧은 수치와 모욕의 기간이 지난 후 두 증인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영광을 맞이할 것입니다.
[4]
사람들이 두 증인에게 나타난 성령님의 권위를 인식한 결과가 <13절>에 나옵니다. 7,000은 완전을 상징하는 ‘7’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음을 상징하는 ‘1,000’을 붙인 것으로 완전하게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을 의미합니다. “도시”는 해 아래 세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성경은 가인이 최초로 도시를 세운 사람이라고 합니다(창세기 4:17). 오늘날은 많은 사람이 도시에서 살지만, <창세기>의 언급처럼 성경은 도시가 하나님께 반하는 성격을 지닌 곳이라고 합니다. 비ㆍ바람ㆍ햇살같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려야 하는 농촌과 달리 도시는 많은 걸 인간의 능력에 의존해 살아갑니다. 그래서 성경은 도시를 하나님께 반하는 성격을 지닌 곳으로 묘사했습니다.
[5]
두 증인의 증언에 힘입어 하나님의 심판이 인간을 위한 구원 행위로 바뀝니다. 두 증인은 심판받은 7,000명을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증언을 통해 모든 사람이 회개하도록 이끌 것입니다. 두 증인인 교회는 어린양의 승리로부터 이 능력을 전달받습니다. 두 증인이 예수님과 같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충성되게 증언했고, 그분이 준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했기에 이들에게도 그분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빌립보서 1:29).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기 전에 보여준 삽입구의 환상은 교회의 사명뿐 아니라 교회가 누리게 될 영광이 있다는 걸 알려줍니다. 예수님의 부활만 우리의 복이 아니라, 그분의 십자가도 우리에게 주어진 복입니다. 바울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영광이 우리 것이라면, 그분의 고난도 우리 것입니다(빌립보서 1:29).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은 한 지체이기에 둘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건 거짓입니다.
[6]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이 받았던 고난은 그분이 누릴 영광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9:20>과 <13절>의 대조는 이에 관한 예시입니다. 나팔심판에서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두 증인이 펼친 복음에 대한 증언이 참된 것임을 입증한 큰 지진이 일어난 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회개했습니다. <9:20∼21>에서 나팔심판은 사람들의 회개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13절>에서 두 증인의 순교적 증언은 사람들의 회개로 이어졌습니다. 요한은 이게 예수님과 교회의 영광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흐름을 통해 <9장>까지 회개하지 않았던 땅의 사람들이 <10장>에 나온 교회의 증언 이후 조금씩 회개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를 핍박했던 사람들이 회개할 것이란 메시지는 초대ㆍ초기교회의 성도에게 위안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7]
<15절>에서 “세상 나라”는 단수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수많은 나라로 해 아래 세상이 구성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성령님은 이 나라들의 본질과 성격, 소속이 같기에 모두 한 나라라고 했습니다. 세상 나라가 얼마만큼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한통속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 주님이란 단어는 주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만,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걸 하나님을 지칭할 때도 썼습니다. <15절>의 용례가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은 이를 위해 예수님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지칭하는 주님을 구별했습니다.
[8]
<17절>을 <1:4>과 비교해보면, <1:4>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또 앞으로 오실 분”이라고 했고, <17절>은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으로 “앞으로 오실 분”을 생략했습니다. 그런데 이걸 직역하면 “오시고 계신 분”입니다. 요한은 이 표현을 하나님의 역동적 미래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미래에만 계시는 분이라고 하지 않고 미래에서 현재로 오고 계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의해 펼쳐질 미래에서 수동적으로 인간을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미래에서 인간이 감지하는 시간인 현재로 과감하게 들어와 우주를 하나님의 계획대로 이끌어 가시는 창조주이십니다. <18절>에서 “뭇 민족이 이것에 분개하였으나”란 말씀은 <시편 2:1>을 인용한 것이고, 이어지는 문장을 직역하면 ‘심판받을 죽은 사람들의 때(카이로스)’입니다. 카이로스는 인간의 시간이 아닌 신(神)의 시간으로써 때가 무르익어 결정적으로 그 일이 벌어지는 시간입니다. 이는 인간의 시간이 아니기에 1년, 2년 혹은 1시간, 2시간처럼 숫자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9]
요한은 하늘에서 찬송이 들린 후에 하늘나라의 성전에서 다시 봉인심판 시리즈에서와 같은 종말적 현상이 나타나는 걸 봤습니다. 번개가 쳤고, 요란한 소리와 천둥소리가 났고, 지진이 일어났고, 큰 우박이 쏟아지는 걸 봤습니다(8:5->11:19). 일곱 번째 나팔 소리로 인해 하늘나라의 찬양이 들림과 동시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전과 성전 안에 있는 주님의 언약궤가 나타났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임재의 상징이며, 언약궤는 하나님과 주님의 백성이 맺은 구원 언약의 상징입니다. 히브리민족이 이집트에서 탈출한 후 광야에서 언약궤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된 상징물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가 본 하나님의 언약궤도 새 언약 백성인 신약시대의 교회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사랑이 상징적으로 드러난 물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언약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됐고(요한복음 19:30), <요한계시록>의 말씀대로 앞으로 나타날 주님의 언약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언약궤의 실체인 예수님이 왔기에 다시 구약시대의 상징인 언약궤를 하나님이 보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따라서 언약궤는 하나님이 주님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을 완성하실 걸 미리 보여주는 약속의 징표로, 이것에 예수님을 능가하는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건 잘못된 해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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