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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보석 중의 보석!'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7-26 11:12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보석 중의 보석

    정처 없이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어느 시골 마을 어구에 이르러 잎이 무성하게 드리워진 정자나무 아래 아주 편편하게 고른 땅을 발견하고 아무래도 하룻밤 신세를 이곳에서 져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여행에 지친 몸을 뉘려는 순간에 마을 쪽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그 마을에 살고있는 한 건장한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을 지르며 달려오고 있었다. 놀란 나그네는 눕던 몸을 일으켜 앉으며 그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가까이 다가와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로 이상한 요구를 했다.

    그것은 "당신이 지니고 있는 보석을 나한테 주시오"라고 아예 명령조로 말하는 것이었다. 나그네는 "보석이오?"라고 반문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예, 제가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꿈에 한 천사가 나타나 해 질 무렵에 이 정자나무 아래로 가서 잠을 자려는 사람에게 보석을 달라 하면 그가 꼭 보석을 줄 것이라 했답니다. 전 지금 돈이 필요하거든요."

    나그네는 그 말을 듣고 주섬주섬 봇짐을 뒤적거리더니 뭔가 꺼집어내어 손에 들고는 "혹시 이것 말인가요? 며칠 전 어느 숲을 지나다가 반짝거리며 빛이 예사롭지 않길래 주웠어요. 이것이 꼭 필요하다면 가져가세요."라고 건네주었다. 마을 남자는 꿈에서 본 환상이 현실로 나타나자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 나그네가 내민 것은 정말로 값이 나가는 금덩어리인지라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냉큼 받아 들고는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날 밤, 그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손에 쥐게 된 금덩어리가 오히려 부담스러웠고 문득 이것이 이 금덩어리가 진짜 꿈에서 본 보석의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동이 터오자 그는 또다시 정자나무 아래로 달려가 아직 지친 여행에 깊이 잠든 나그네를 깨웠다. 그리고 대뜸 어제의 그 금덩어리를 불쑥 내밀며 "선생님, 이 금덩어리를 선뜻 내어주신 그 보이지 않는 보석을 제게 주시고 이 금덩어리는 선생님이 가지세요."라고 말했다.

    어느 책에서 발췌한 이 기발한 이야기를 도입하거나 엮어낸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성경적 보석론(寶石論)을 아주 심도 있게 드러낸 것 같아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보이지 않는 보석", 마을 남자가 금덩어리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그 보이지 않는 보석 중에 보석은 나그네의 욕심 없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이에 빗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야 할 '보이지 않는 보석'은 무엇일까? 이 이야기를 발췌한 책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영생으로 인도하시리라는 아름다운 소망'이라고 친근하게 답하고 있었다. 이를 전제하고서라도 너무도 많은 여운을 남긴다. 단편의 시구 같지만 교훈은 금광 채굴을 능가할 것으로 가늠된다.

    우선 보석을 요구했을 때, 설사 보석에 욕심이 없다 할지라도, 현실적으로 노숙을 피할 수 있는 기회 조건을 제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나그네는 누구도 돌을 던질 수 없는 그 흔한 현실주의를 패스했다. 또한 나그네가 금덩어리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그랬다 할지라도 그것은 석연치 않다.

    그때의 마을 남자는 금덩어리의 주인이라는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요구한 사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나그네는 정직이라는 통상적 도덕성도 패스했다. 또 하나 그 금덩어리를 요구한 남자는 허황된 꿈자리 환상을 넋두리로 지껄거리며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금덩어리를 준다 해도 그 가치를 가치 되게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그에게 금덩어리를 내밀었다는 것은 금덩어리라는 물질적 가치관을 패스한 사람이 틀림없다. 결국 그는 현실의 삶에 인생관을 건 현실주의 자도 아니고, 성인군자들처럼 도덕성에 인생관의 무게를 둔 윤리주의 자도 아니고, 부와 물질적 가치관에 인생을 건 황금만능주의 자도 아님이 분명했다.

    아니면 정신 병자나 천치 바보일까? 그러나 보편적으로 이런 지병을 가진 자들은 손에 쥔 물건의 가치를 알든 모르든 타인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기에 그것도 아니다. 이야기 속에서 피해 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대에게 논리적인 대화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변명하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마을의 남자가 다시 되돌아와 금덩어리를 내밀었을 때도 감출 수 없는 어떤 묘한 아쉬움에서 안도의 표정을 짓는 모습도 없었고 어떤 제스처를 통해서 뉘앙스를 암시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온유한 자의 인간 모형이었던 이삭의 온유함을 보는 듯 했다.

    이삭이 그랄 지역에서 번성하자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질투하여 그의 선친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메웠고, 이삭은 그랄 지역을 떠나면서 그 우물들을 다시 팠으나 그랄 지역의 블레셋 사람들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빼앗을 때 이삭의 목자들이 그들과 다투었으나 오히려 이삭은 평화를 위해 다른 곳으로 옮기는 모습을 보였었다.

    위 이야기 속의 나그네의 그림이 어찌 이삭과 다르다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께서는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히 제 몸을 맡기고 있는 양처럼 전혀 무저항의 온유함과 겸손과 순종의 자태를 보여 주셨다. 광야로 끌려가 버림을 받은 아사셀의 염소처럼 골고다 십자가에 못 박혔어도 저항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에게 당신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이를 배우라고 교훈하셨던 가르침을 당신 스스로 실천해 보이셨던 것이다. 어찌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온유함과 겸손의 덕목이 이 뿐이겠는가? 십자가 상에서 남기신 가상 칠언의 음성이 아직도 우리들의 귓전에 메아리쳐 울리고 있지 않은가?

    보이지 않는 보석, 무엇일까? 이야기 속의 마을 남자가 꿈 이야기를 통해 천사의 존재를 거론했다는 것은 지상 교회와 성도를 겨냥한 의도가 농후하며 이에 상대적으로 나그네는 그리스도를 암시하고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나그네의 행동은 그리스도만이 본 보여 주신 공생애의 그림이 아니든가! 보석 중의 보석 말이다.

    어떤가? 오늘도 그대는 여전히 나그네를 만나기 전의 마을 남자와 동일한 꿈을 꾸며 불로소득의 환상을 추구하는가? 왜, 온통 기도들이 물량적일까? 왜, 강단의 메시지들이 온통 기복적일까? 나그네에게는 금덩어리보다 더 귀한 보석이 있음을 보고 깨달았던 마을 남자와 같은 교회가 되고 성도가 됨이 옳지 않을까? 그대여! 잠시 멈춰 뒤돌아 주님을 보라!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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