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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편143:8)■
(빌레몬서 1장 17~18절)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그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이 있으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
(화해와 용서의 실제론)
거부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위기 사회가 지구촌의 자존심을 짓밟는 가운데 감염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다시 불붙기 시작하고 시장 경제의 불안 요인이 서민 경제와 국가 경쟁력에 타격을 멈추지 않아 여기저기서 아우성들이네요. 과거 보릿고개를 넘겨야 했던 시절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경제 활동의 전성기를 달리는 현대 사회의 호황기 상태가 극복하기에는 획기적인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성경 잠언서의 지혜자는 플러스 지혜를 하나님의 도모와 경영에 준거를 두고 경외와 경건의 나침판으로 방향 키를 잡았습니다. 신앙의 세계를 지혜의 범주에 넣고 인생론을 해석함으로써 현상 세계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결론 내립니다. 결국 인생의 본분을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도출했고 믿음의 실천론을 정의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그 어떤 의문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현존하는 무신론이나 아니면 범신론 혹은 다신론 주의와 같은 사상누각을 배려하거나 증명을 위한 여지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관여하시지 않는 세상의 그림에 대한 개념도 의미도 지혜자에게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잠언의 지혜와 지혜 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의인화한 모형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대를 축복합니다.
오늘 묵상할 말씀은 바울이 빌레몬에게 사적으로 보낸 서신으로 사회적 계급이나 지위 고하를 초월하여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의 띠로 묶인 공동체가 바로 우리 기독교라는 전제를 필두로 그 어떤 이해관계가 개입한다 할지라도 상호 용납 내지는 사랑의 줄로 꽁꽁 묶어야 한다는 고등한 윤리를 교훈한 내용을 배경으로 합니다.
어차피 인간 사회는 죄악이 관영한 상태라는 성경의 진단에서 자유할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외압에 의해 나라와 민족이 큰 위기에 직면할 때면 의사(義士)들이 일어나 외압에 맞서 투쟁하기도 하고 온 국민의 목소리를 외치기도 합니다. 또한 살신성인의 칭호로도 부족할 국민 의식을 가진 자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나 그런 사회적 의지를 가진 모두가 성경적 의인은 아니며 죄악이 관영한 사회가 보편성을 뛰어넘어 특별한 사회적 의에 희생하고 선한 모범을 보였기에 붙여준 칭호일 뿐입니다. 곧 그들의 선한 행위나 업적이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그 어떤 인생도 인생의 구원자로 설 수 없기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성경이 주장하는 화해와 용서의 정신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종적 관계에서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은 형벌적 형편에 처한 우리 인간을 하나님과의 화해를 목적으로 우리 인간의 죗값을 십자가의 대속 제물로 기꺼이 내어 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기인합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십자가 사랑의 실천이었습니다.
본 서신의 수신자 빌레몬은 본서에서 바울이 빌레몬에게 본 서신을 통해 화해와 용서를 전제로 천거하는 오네시모의 주인이었습니다. 오래전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 빌레몬의 소중한 물건을 훔쳐 도망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가 어떤 연유로 로마 감옥에서 바울을 만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오네시모는 거듭나게 됩니다.
빌레몬은 돈독한 신앙을 가진 자로서 바울이 동역자로 칭할 만큼 골로새 교회를 신실하게 섬겼던 일꾼이었습니다. 사실 본서의 서신 내용은 짧지만 빌레몬의 영적 상태를 아주 조목조목 언급함으로써 후대의 교회 직분자들에게 귀감을 주고 있다는 것이 탁월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바울의 사랑을 남달리 많이 받은 인물이지만 그 역시 이에 못지않게 다른 성도들을 지극정성으로 사랑하고 섬겼을 뿐만 아니라 힘겨운 사역 중에 옥중 신세를 지고 있었던 바울에게도 더할 수 없는 기쁨과 위로를 주기도 했습니다(7절). 그리고 빌레몬은 자기 집을 예배를 위한 집회 장소로 제공한 것으로도 추측됩니다(2절).
바울은 본문에서 이렇게 훌륭한 영적 지도자 빌레몬에게 빌레몬의 배신자 오네시모를 천거하며 그의 회심 사건과 변화된 삶을 소개하면서 용서해 줄 것을 아주 신중하게 부탁합니다. 바울의 부탁은 용서를 넘어 특별하게 영접하되 마치 바울 자신을 영접하는 것처럼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리고 오네시모가 도망치므로 인해 피치못 할 손실이 발생한 부채에 대해서는 그가 값을 능력이 없으므로 바울 자신이 변제해 줄 것을 약속했고, 심지어 이제 천한 노예가 아니라 형제처럼 대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바울은 이 문제를 해결하면서 오네시모의 아버지 입장에 서서 보호자의 책임으로 접근했습니다.
우리는 이 짧은 사적인 서신에 담아낸 화해와 용서의 비밀을 빌레몬도 오네시모도 아닌 바울에게서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신앙 세계의 신앙과 삶은 결코 구원이나 신국 건설이라는 큰 그림만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바울은 구속사적 큰 줄기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아주 개인적이거나 다양한 사적 관계에서 대두될 수 있는 종적 혹은 횡적 대소 문제를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울의 인격과 신격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으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될 우리 기독교의 세계관이요 윤리관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주 작은 겨자씨에서부터 믿음의 크기를 정의하셨습니다. 천국의 확장을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데서부터 출발하셨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참 이스라엘 사람으로 칭찬하실 때도 큰 업적이 아닌 한 무화과나무 밑에서 기도했던 장면을 거론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에서부터 충성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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