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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 '참 이웃의 근성'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8-09 16:35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참 이웃의 근성 ♧

    어느 날 유대교의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인지 물었다. 예수님은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 물으셨고, 율법사는 위로는 하나님을 온 마음과 뜻과 성품을 다하여 사랑하고, 아래로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함을 가르쳤다고 대답을 하게 된다. 역시 율법에 익숙한 답안지였다.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답안지를 인정하시고 이를 행하라고 하셨다. 신이 난 율법교사는 자신을 더욱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질문한다. 예수님은 이 질문을 받으시고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에게 제사장과 레위와 사마리아인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셨다(눅 10:25~37).

    사실 율법교사의 접근 의도는 율법 해석 상 교리적으로 애매모호한 질문을 던져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그 의도를 간파하셨고, 수비적 자세를 취하시며 율법교사의 질문을 전도(顚倒) 시켰고 율법의 한계성과 인간의 율법 실천 불가능성을 인식하게 하셨다.

    동시에 사랑의 진리와 그 위대성을 천명하셨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는 율법교사의 질문은 '누구를  사랑하며 누구를 사랑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라는 한계선을 명확히 요구한 것이었다. 이는 율법교사가 사랑은 적극적인 실천의 문제가 아니라 의무적이고 한정적이며 수동적인 문제로 본 것이다.

    참 사랑은 이기적이고 한계적이고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무조건적인 것이다. 따라서 율법교사는 이미 진정한 사랑의 의미에서 탈선해 있었고 도대체 사랑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문외한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결국 예수님은 이러한 율법교사에게 이 비유를 통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의 반문을 하심으로써 역전시킨 것이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와 "누가 나의 이웃인가?"의 물음이 동일한 의미의 질문처럼 느껴지지만 분명한 것은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전자는 화자가 중심이 되지만, 후자는 대상이 중심이 된다. 예수님은 누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를 답하지 않고 모든 이웃이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답하셨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도입하신 예수님의 의도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참된 이웃이란 대상을 신앙과 비 신앙, 종교인과 비 종교인을 비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적어도 강도 만난 사람의 형편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생명이 위험한 상태다. 따라서 강도 만난 사람의 참 이웃은 신속하게 치료를 받게 해서 생명을 살리는 사람이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강도 만난 사람의 참 이웃에 대해 해석할 때, 제사장과 레위인을 신앙 세계의 대표적 성격으로 사마리아인을 불신앙의 대표적 성격으로 단정하여 설명하고 불신앙의 세계에 '참 이웃'의 한 표를 던지기도 한다. 그러나 주께서 이웃 사랑의 비유로 제시한 그 비유에는 뉘앙스가 암시되어 있다.

    그 비유의 배경에는 유대인으로서의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유대 사회로부터 죄인 취급받는 사마리아 사람의 관계성과 이에 대한 당시 유대 사회의 인식론이 있고 또한 상대적으로 사마리아 사회의 인식론이 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사회는 이미 노아 때의 "하나님의 아들들"(창 6:2), 곧 셋의 후예들과 맥을 같이한다.

    그 동일성은 '하나님의 심판의 때'였다. 다만 노아 때는 홍수 심판으로 노아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류는 죽었지만, 예수님 공생애 당시의 유대를 포함한 온 세상은 사람을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한 죄의 도말이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바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의 분명한 목적이다.

    따라서 이미 제사장과 레위인을 포함하여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사마리아를 포함한 모든 세상은 죄악에 전적으로 노출되어 메시아의 대속 사역에서 심판의 대상인 것이다. 이 세상 그 누구도 성역이 있을 수가 없고 죄를 도말하시는 메시아의 대속 사역 아래 있었다. 이 대목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이방의 구별은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종교인과 비종교인의 비교도 아니며, 종교 지도자와 평민의 비교도 아니며, 선한 자와 악한 자의 비교도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포함하여 죄다 죄인이기에 그 등장인물들의 출신이나 종교적 배경으로 접근하는 것은 무리라고 할 수 있다. 부득이하게 따진다면 요한복음 4장에 나타난 사마리아 여인을 참고해 보면 분명 해진다.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강하게 오픈되는 뉘앙스는 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죄인 취급받는 대목에서 억울하다는 제스처보다는 오히려 죄인임을 인정하며 숨죽이고 살고 있었고 메시아가 오시면 회복될 새로운 시대를 늘 소망하고 있었음이 여지없이 오픈되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 성전에서 각기 제사를 행하고 있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이방인도 불신자도 아니다. 메시아를 대망하는 분명한 신앙이 있는 사마리아의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까닭에 사마리아 사람을 불신의 이방인으로 매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예수님의 의도는 다만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있어서 최선의 이웃은 강도로 인해 입은 상처를 치료받을 수 있도록 해 준 사람이라는 가르침이다. 

    율법교사의 오류는 범하지 말자. 그리고 지나치게 확대 해석하여 가르침의 본질을 놓치거나 훼손하는 불충은 짓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성경적 선(善)은 여호와 경외 신앙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도 본질적으로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뿐이심을(마 19:17) 분명히 하셨다.

    그리고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붙은 '선한'의 수식어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참 이웃이 되어 주었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 성민 십이만여 명이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임을 말씀하시고 그런 그들을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냐며 심판보다는 회개의 기회가 선행되어야 옳음을 지적하셨다.

    이에 니느웨 왕이 분연히 일어나 성민 전체를 향해 통회의 금식을 선포하고 심지어 가축들에게까지 일체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게 하고 죄다 굵은 베 옷을 입고 회개하며 강포에서 떠날 것을 명령한 기사는 오늘의 지구촌을 향해 던지시는 하나님의 준엄한 경고와 거국적 통회를 촉구하시는 메시지임이 틀림없다.

    그랬다. 요나는 니느웨 성민들의 참된 이웃으로 하나님 앞에 변호자가 되어 주었어야 옳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요나는 니느웨 성민들의 참된 이웃이기를 거부했지만 오히려 니느웨 성민들이 이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참 이웃을 보지 못하고 있는 요나의 심판 메시지에 정신을 똑바로 차렸으니 말이다. 

    오늘은 그대에게 있어 이웃 곧 더불어의 주체들이 인류요, 민족이요, 시민이요, 지역민이요, 이웃사촌이요, 가족이라면 그 이웃들에게 가장 절실한 현실이 무엇인지를 봐야 할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는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의 절실함이 무엇인지를 보고 즉각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참 이웃의 근성에 인 박히자!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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