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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아름다운 동거!'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8-15 04:00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시편 133:1-3
아름다운 동거(同居)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시편 133:1-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구성원이 됩니다. 마치 갓난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가족의 구성원이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물론 최근에는 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채 오랜 기간 교회에 출석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분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지도 모릅니다. “나는 하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어요.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너무 위선적인 것 같아요.”

물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은 여전히 부족하고 흠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오히려 병든 자에게 의사가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이 세상에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막 2:17).

하나님과 여러분의 관계는 친숙하고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말은 우리가 싫든, 좋든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한 가족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 후에 받게 되는 세례예식은 사적으로, 은밀하게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반드시 세례는 주일예배 시간에, 그것도 모든 교우들이 참여한 가운데 행해져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병상에서 임종을 앞두고 있는 분들처럼 어쩔 수 없이 목사가 병상을 찾아가 급하게 세례를 주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목사는 교회의 성도 몇 분과 반드시 대동하여 그 분의 세례가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외동딸이나 외동아들로 부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 언제나 행복한 일만 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가끔씩 다른 그리스도인과의 관계를 통해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주 나와 성격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그들과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공통의 관심사를 갖고 있거나, 또는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 이외의 사람과 교제하는 일을 꺼린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성도의 모습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고백하는 한 형제요, 한 자매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내가 믿음의 공동체의 일원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것인가?”입니다.

이런 면에서 시편 133편은 우리가 따라야 할 삶의 모범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절)”

우리는 성경에서 공동체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공동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고 표현하고 있습니다(창 1:26).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공동체였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둘을 가정이라고 하는 공동체로 엮어 주셨습니다.
 
예수님도 혼자 사역하신 것이 아니라, 열두 명의 제자들과 함께 사역하셨고, 그들과 함께 공동체로 생활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 승천하셨을 때, 120명의 성도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습니다(행 2:1). 성령께서 이 모임에 불같이 임하시자, 이 모임은 훗날 교회라고 하는 신적인 공동체(divine community)로 사람들에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교회가 개인주의화 되려는 위기의식을 느끼고 다음과 같이 권면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4-25).”

아마도 교회의 공동체 성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한 책은 독일의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신도의 공동생활」이란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원래 이 책은 1939년, 그 당시 독일의 히틀러를 반대하던 본회퍼가 논문으로 작성했던 책이었습니다. 이 책은 본회퍼가 일종의 기숙사를 의미하는 ‘형제의 집’에서, 2년간 공동생활을 경험한 후에 지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에게 공동체를 경계하게 하라. 공동체에 있을 수 없는 사람에게 홀로 있는 것을 경계하게 하라. 그리스도인에게는 교제의 시간과 고독의 시간이 있어야 하며 양자 모두 예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다. 전자의 표지는 대화이며, 후자의 표지는 침묵이다.”

여기서 본회퍼가 의도한 침묵은 단순히 말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잠잠히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회퍼는 그리스도인의 교제가 갖는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교제에서 얻은 힘으로 홀로 있는 사람은 복 되도다. 홀로 있는 데서 얻은 힘으로 교제를 유지하는 사람도 복 되도다. 그러나 홀로 있는 데서 얻은 힘도, 교제에서 얻은 힘도 오로지 교제 가운데 개인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웃을 사랑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성도와의 교제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침묵의 시간도 필요합니다.

교제의 시간이건, 침묵의 시간이건, 둘 다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교제와 침묵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교제의 시간’과 ‘침묵의 시간’이 가장 이상적으로 섞여 있는 시간은 단연 ‘예배의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시간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그 말씀은 개인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고, 공동체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어떤 분에게는 관계에서 거리낌을 느끼는 사람들과 함께 예배하는 일이 마치 무엇인가를 견뎌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습니다. 혹은 좀 더 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한 세금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는 일은 마지못해 견뎌내야 하는 일도, 가치 있는 일을 위해 치러야 하는 세금 정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며, 결국에는 우리의 믿음과 삶을 성장시켜 줄 축복의 통로가 될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읽고 있는 시편 133편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사람들이 불렸던 찬송입니다.

사람들은 일정한 음률에 맞추어 이 찬송을 부르면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향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0미터나 되는 높은 곳이고, 그 주변에는 큰 산들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 있습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강도의 위협과 들짐승의 위협이 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위험한 길은 결코 혼자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무리를 지어 함께 올라가야 합니다.

그들은 각지에서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었고, 다양한 성격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공통점은 그들이 한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비록 그들이 인격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전하지는 못하다 하더라도, 고달프고 위험한 순례 길에 그들은 충분히 서로를 위로하며 마음을 함께 모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 가지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입니다.

저는 간접적으로나마, 공동체가 한 가지 목적을 갖는 일의 유익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한 후, 6주간의 훈련소 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12시간이 소요되는 행군이었습니다. 30kg 완전군장을 한 채 가파른 강원도 산길을 오르내리는 일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훈련생들이 사회에서 그토록 힘든 훈련을 받은 적은 없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들 대부분은 겁에 질려 있었고, 자신이 힘든 훈련을 잘 버텨낼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선배 기수들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그 악명 높은 코스를 우리들은 일명 ‘땡칠이 고개’라고 불렀습니다. 그 고개를 넘을 때 우리들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나의 앞뒤에서, 나의 좌우에서 함께 길을 걷고 있는 전우였습니다.

옆에 있는 전우가 어떤 성격을 소유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함께 비탈길을 오르고 있는 전우가 사회에서 어떤 가치 있는 일을 했는지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 주변의 전우들이 나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나와 동일한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한 힘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장 고통스러울 때 파이팅을 외치며 서로를 격려했습니다. 물론 행군 중간에 길에 쓰러져 구급차로 실려 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저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우들은 서로를 격려하는 덕분에 이를 악물며 그 힘든 훈련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같은 순례를 길을 걷고 있습니다. 마치 적들의 한 복판에서 살았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 가운데서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교제를 나누고, 성만찬에 참여함으로써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순례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들이 피해야 할 두 가지 극단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째는 형제, 자매를 동료의식으로 대하지 않고 경쟁자로 대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다보니까 어려운 것들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우리 아이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싸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이들이 어렸을 때만해도 그들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풍족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먹는 음식도 풍족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 아이들은 더 좋은 장난감을 얻기 위해, 더 많은 음식을 먹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서로를 함께 즐거운 식사를 나누는 동료로 보기보다는 경쟁자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아이들이 많이 커서 다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말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형제 가인과 아벨도 누가 하나님께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싸웠고, 그 결과 살인으로 이어졌습니다. 요셉을 시기했던 형제들은 그를 죽이려고 노력했고, 결국 요셉을 애굽에 종으로 팔아버리고 말았습니다. 

미리암과 아론은 그 동생 모세와 다투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기회만 되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습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도 흔하게 발견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노래가 얼마나 부르기 어려운 노래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피해야 할 극단은 교회를 하나의 제도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인격적인 관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기능에 의해서 다루어지게 됩니다.

공동체에 어떤 목표가 제시되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계획과 조직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연말에 가서는 그 조직이 계획했던 목표를 얼마나 이루었는지 평가한 후에 그 결과에 따라 성도들의 헌신 도가 평가됩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은 교회의 공동체성을 잃게 만듭니다. 서로를 ‘형제, 자매’로 대하며 세심하게 신경을 쓰기보다는, 각자가 얼마나 교회의 발전에 기여했는지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적은 장난감과 음식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어린 아이들의 꼴이 되고 맙니다. 

형제와 자매는 더 이상 서로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경쟁자로 생각하는데, 이는 불행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공동체는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배려하며, 서로를 신뢰하고, 서로에게 헌신합니다.

시편 133편은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와 관련하여 유용한 두 가지 그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그림은 다음과 같습니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2절)”

출애굽기 29장에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제사장 직분을 위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먼저 희생 제물로 드려질 짐승들이 준비됩니다. 그 다음 아론과 그 아들들을 회막 문에 데려다가 물로 깨끗이 씻긴 후에 제사장 예복이 입혀집니다. 그 다음 성경은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관유를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부어 바르고…너는 이같이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위임하여 거룩하게 할지니라(출 29:7,9).”

기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성령을 상징합니다. 기름은 반짝거리고, 열기를 흡수하며, 피부를 부드럽게 해 주고, 사람들에게 향기를 선사합니다. 때로 기름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공동체에는 따뜻함과 편안함이 필요합니다.

더군다나 여기에 사용된 기름은 그가 제사장임을 표시해 주는 구별됨을 상징합니다. 아론의 머리에 부어진 기름은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립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거룩한 일을 위해 제사장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형제, 자매를 나의 제사장으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형제, 자매를 하나님이 구별하여 기름 부으신 거룩한 존재로 여길 때, 우리의 관계가 훨씬 더 깊어질 수 있습니다.

내 옆에 있는 형제, 자매를 무엇인가 부족하고, 그래서 비판할 것이 많은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나의 제사장이다!”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본회퍼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기독교적 형제 사랑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현실이지 심리적인 현실은 아닙니다. 즉,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세주로 우리 마음에 모셔오는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자연적인 촉구나 힘 또는 우리 인간 정신의 역량에서 파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 사랑은 헌신적이거나 경건한 영혼들의 교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에 의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교제입니다. 형제 사랑의 기초는 진리이지 욕구가 아닙니다.”

그래서 본회퍼는, “내 마음 속에 있는 그리스도는 희미하지만, 형제의 입으로 전해지는 그리스도는 분명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가령, 어느 형제가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긍휼이 여긴 믿음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지고 그 형제의 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위로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 때 그 형제는 자기를 방문한 성도들이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방문하는 것처럼 여긴다고 본회퍼는 이야기합니다. 

제가 어느 모임에 가서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곳에 계신 어느 집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맞아요! 목사님, 제가 예전에 몸이 아파서 몇 달간 교회에 나오지 못했는데 교회 목사님과 성도님들이 제가 입원한 병실을 찾아와 예배를 드려주었는데, 그 때 저는 정말 예수님이 병실에 찾아오신 것처럼 생각이 되었어요. 그 때 제가 큰 위로를 얻었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옆에 있는 형제와 자매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거룩한 제사장으로 여기십시오. 주님이 여러분을 격려하기 위해 보낸 사자(使者)로 여기십시오. 

두 번째 그림은 이런 것입니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3절 상).”

헐몬 산은 갈릴리 호수 북동쪽에 위치해 있는 높이가 2,700미터나 되는 높은 산입니다. 이 산의 최고봉에는 일 년 내내 눈이 쌓여 있는데, 이 눈이 녹아 요단강으로 흘러들어 팔레스타인 땅에 물을 공급하는 주요한 수원이 됩니다.

또 산꼭대기에는 밤 동안에 엄청난 양의 이슬이 내리는데, 강우량이 적은 이 지역에서 이슬은 식물에 수분을 공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건조하고 황량한 땅에 아침마다 신선함과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다량의 이슬!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을 적시고, 그것으로 인해 수많은 식물이 자라 비옥함을 유지하는 근원이 됩니다.

믿음의 공동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해 언제나 기대감을 갖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사람 가운데 혹은 저 사람 가운데 어떻게 일하실까 궁금해 하며, 서로에 대해 기대감을 갖는 일이 필요합니다. 서로에 대해서 미리 예측하고, 서로를 분류한다면 이것처럼 더 잔혹한 일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중에 유약한 마가 요한이 집으로 되돌아가는 일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적잖이 싸우지 않습니까?

어쩌면 바울은 마가 요한의 행동에 실망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유약하니 어떻게 복음사역을 훌륭하게 완수할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훗날 그토록 유약하게 보였던 마가요한이 사복음서 중에 하나인 마가복음을 기록할지 누가 알았겠습니까? 더군다나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기록되어 다른 복음서들의 기초자료가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그에 대한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헐몬 산에 내렸던 이슬처럼, 조금 씩 조금 씩 사람이 바뀌어 가고 성장해 갈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새로운 사람이고, 우리의 가능성은 끝이 없습니다. 이런 공동체에 소외감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현재의 모습에 실망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점점 성장하고 좋아질 모습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만남이 몇 번 만나고 식상한 것이 아니라, 방금 헤어져도 또 만나고 싶은 신선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결국 서로에 대해 기대감을 갖는 공동체가 번성합니다.

아론의 수염까지 흘러내린 기름처럼 따뜻하고, 헐몬의 이슬처럼 신선한 교제를 나눌 때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믿음의 결국은 무엇입니까?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3절 하).”

우리가 만일 따뜻한 관계를 누리고 새로운 기대감을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이미 천국이 가져다주는 기쁨을 맛보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완전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 세상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는 영육간의 기쁨과 충만한 즐거움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가 중간, 중간 소개했던 본회퍼의 글들은 모두 「신도의 공동생활」에 기록된 것들입니다.

그가 이 책을 쓸 때, 그는 나치 치하에서 도피한 신학생들의 공동체를 인도할 때였습니다. 그는 도피 생활 중에도 공동체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묵상했던 사람입니다.

실제로 그는 공동체의 생활 지침서를 제시할 목적으로 이 책을 썼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크의 강제 수용소에서 일하던 의사는 이런 보고서를 썼습니다. 

“그 날 아침, 대여섯 시경, 죄수들은 감방에서 끌려 나왔고 판결문이 낭독되었습니다. 수용소 건물 중, 어느 방인가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그 사이로 본회퍼 목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는 아직 죄수복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그의 주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진정한 헌신과 주님이 듣고 계시다는 확신을 전하기에 충분했던, 그 매력적인 사람의 기도는 나를 깊이 감동시켰습니다.” 

드디어 아침이 왔습니다. 이제 죄수들에게 “옷을 벗으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그들은 나무 아래 있는 계단을 따라 처형장으로 끌려갔습니다. 본회퍼는 봄내음 가득한 숲의 교수대 아래에서 벌거벗겨진 채, 마지막으로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습니다.

5분 후, 그의 생애는 끝이 났습니다. 그로부터 3주 후에 히틀러는 자살했습니다. 다음 달에 히틀러가 이끌던 제 3제국(Third Reich, 1933-1945)이 멸망했습니다.

본회퍼가 죽었다는 소식은 제네바를 거쳐, 영국에 전해졌습니다. 7월 27일, 추도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수백 명의 목소리가 장엄하게 본 윌리엄스(Vaughan Williams)의 “온 성도 위하여(For All the Saints)”라는 승리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서 한 독일인이 영어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여기 하나님의 임재 앞에, 그 분의 종 디트리히 본회퍼의 삶과 사역을 감사함으로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그는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앞에 믿음과 순종으로 자신의 삶을 드렸습니다.”

본회퍼의 삶은 시편 133편의 첫줄에 대한 연구였다면, 그는 죽음으로 시편 133편 마지막 행에 대한 주해를 단 것입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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