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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채플교회 이광형 목사, '그 잔치에 계십니까?'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8-17 04:00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그 잔치에 계십니까?
(눅15:4‭-‬32)

일방적인 사랑에 대해서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만일 사랑이 일방적이라면 그럼에도 사랑 자체는 고귀하다 이야기 할 수는 있더라도 그것은 안타깝고 주의해야 할 것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일방적인 사랑이 가능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사랑의 근원, 곧 사랑 자체로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동시에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지시기 위하여 일방적인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렇기때문에 하나님의 일방적 사랑은 구원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것이고, 하나님이시기에 하셔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후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에 그 사랑에 힘입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음 역시 결코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잘 믿어야 한다', '더 열심히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자칫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만약 믿음에 있어서 이유 불문하고 더 열심만을 강조한다면 그것은 그저 맹신(overcredulity)
일 뿐 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 처럼, 믿음 또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믿으셨기에 우리 역시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저 믿음의 열심만을 보이라 하신적이 없습니다.

믿으라 하시는 동시에 믿음의 증거를 보이시며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한 믿음을 바라시고 요구하시기에 앞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을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믿으시기에 우리도 믿음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목자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찾아다니다 결국 그 양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목자의 입장에서는 갈등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야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나머지 아흔 아홉마리를 그 자리에 방치해 두고 찾아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 한마리의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잘 못 했기에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양이 잘 못 한 것입니다.

목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고, 다른 양들 처럼 무리에 함께 있지 않고 혼자 딴 짓 하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나머지 아흔 아홉마리의 양들은 늘 목자의 음성을 듣고 순종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남겨진 양들의 입장을 언급합니다.

따라서 목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잃어버린 양을 찾기위해서 아흔 아홉마리를 다 데리고 같이 갈 수는 없는 일이기에 지금 그 자리에 두고 찾으러 가야합니다.

이 때 목자는 사랑과 신뢰를 가지고 결정을 합니다.

목자의 사랑은 잃어버린 양이 영영 잃어버린 바 된 양이 되도록 놔 둘 수 없기에 찾아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남겨진 아흔 아홉마리에 대한 목자의 믿음이 굳건했기에 잃어버린 양을 찾기위해 길을 나설 수 있었습니다.

만일 남겨진 아흔 아홉마리의 양 중에 목자가  잠시 보이지 않음으로 흩어져 또 다른 양을 찾아야 하는 일이 있더라도 목자는 지금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기로 결심했습니다.

이 때 목자는 잃어버린 양 한마리에 대한 사랑과 동시에 들판에 남겨져 목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려하는 아흔 아홉마리의 양들에 대한 신뢰가 있기에 찾으러 떠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목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이유로 아흔 아홉마리의 양 무리가 다 흩어진다면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목자는 남겨진 양들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목자의 믿음은 단순히 강한 바램이 아니라 자신의 양들을 잘 알고 있기에 가질 수 있는 확신입니다.

또한 남겨진 양들 역시 목자를 신뢰하고 믿었습니다.

목자는 반드시 잃어버린 양을 찾을 것이고,  돌아올 것이며, 행여 남겨진 자신들 중 하나가 잃어버린 바 되었을지라도 자신의 목자는 기필코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목자와 양들은 서로를 향해 이러한 신뢰와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설 수 있었고, 나머지 양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어깨에 매고 돌아오는 목자를 기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돌아 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자신의 몫을 받고 아버지를 떠났다 다시 돌아 온 둘째 아들을 주목하며 거기서 받는 은혜를 언급합니다.

따라서 그 이야기에서의 주인공은 당연히 둘째 아들이며 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며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해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등장하는 큰 아들의 모습 속에서는  실패하고 돌아 온 동생과 그를 위해 잔치를 베풀어주시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원망을 통해,  우리의 모습 가운데 경계해야 할 시기심 쯤으로 생각하는 것이 전부입니다.

다시 말해서 둘째 아들의 삶과 그를 반기며 맞아주시는 아버지를 통해서는 감격하고 은혜를 받지만, 큰 아들의 삶과 아버지의 대화를 통해서 은혜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성경은 아버지의 집에 계속 살아온 큰 아들은 제외하고 아버지를 떠났다 돌아 온 둘째 아들만을 보라고 하시는 것인지 다시 살펴 봐야 합니다.

단순히 둘째가 주인공이기에 첫째는 조연에 불과한 것이겠습니까?

아마 사람은 그러한 시각으로 보고 판단할지 몰라도 성경은 결코 그렇게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챙겨 아버지를 떠났다 다시 돌아 온 아들의 죄는 집을 떠난 후에 타지에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를 떠나겠다는 순간부터 그리고 아버지를 떠났다는데 있습니다.

그가 다시 용서받고 회복 될 수 있었던 것은 실패하고 자신의 삶을 후회했다는데 있는것이 아니라 실패한 삶 가운데서 아버지를 생각하고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왔다는데 있습니다.

성경은 얼마만큼의 재산을 탕진하고 어떠한 삶을 살았는가가 아니라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에, 그리고 얼마나 뼈저리게 후회하고 겸손해졌는지가 아니라 아버지에게로 돌아왔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따라서 돌아 온 탕자의 이야기에서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주인공은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이겠지만, 이 이야기에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 된 주신공은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돌아온 둘째나 아버지 곁에 머무른 첫째는 분명히 있을 수 있는 우리의 상황과 경우입니다.

둘째 아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잘 알고 계시기에 이정도만 언급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오늘 우리의 시각을 첫째 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로 돌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아들은 재산을 모두 탕진하고 실패한 둘째가 돌아왔다는 이야기와 그를 위해서 아버지가 하신 일들을 모두 듣고 화가났습니다.

그래서 둘째를 위한 잔치 자리에 참석하기를 거부합니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럴만도 합니다.

지금까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섬김을 다하며 아버지의 말씀을 성실히 지켜온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 주신적이 없으시면서, 아버지 명예를 더럽히고 떠나 실패하고 돌아온 둘째를 위해서 잔치를 벌이심에 무척 서운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들으면 첫째 아들의 서운함과 분노가 그럴듯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결코 합당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돌아 온 둘째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 이유는 둘째가 돌아온 것에 대한 기쁨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동안 아버지에게 기쁨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기쁘지 않기에 첫째 아들을 위해서 염소새끼 한마리도 잡아주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째 아들은 늘 아버지의 곁에 있었고 언제나 성실하게 섬김을 다해왔습니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있어서 첫째 아들은 그 자체가 기쁨의 존재입니다.

다만, 첫째 아들에게 이야기한대로 둘째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게 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어떠한 존재이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 곁에서 그 섬김을 다함으로 늘 그 자체로 하나님의 기쁨이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죽었다 살아나고 잃었다 얻게 된 존재로 하나님의 기쁨이기를 바라십니까?

물론 어떠한 존재로든 하나님은 우리의 존재를 기뻐하십니다.

죽었다 살아나고 잃었다 얻게 된 둘째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달려나갔습니다.

그리고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으로 갈아 입히고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우고 신을 신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다시 찾은 큰 기쁨을 나누기위해 잔치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십시오.

그 잔치는 단순히 둘째 아들만을 위한 잔치이겠습니까?

사실 둘째는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환대를 받고 옷과 가락지 그리고 신을 신기 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무슨 명목으로 스스로를 위한 잔치를 즐기겠다고 하겠습니까?

그 잔치는 말 그대로 기쁨의 잔치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위한 잔치 이기 보다는 그로 인한 기쁨을 함께 누리는 잔치입니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잔치가 시작되고 첫째 아들이 자리에 없음을 발견한 후 달려 나왔습니다.

마치 둘째 아들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온 것 처럼 큰 아들이 없음을 알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중 나온 아버지 앞에서 첫째 아들이 불평과 서운한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첫째는 자신을 기다리며 자리에 없음에 찾으러 나오신 아버지를 보고, 또 지금 스스로의 모습을 먼저 봤어야 합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이미 자신의 손가락에 끼우고있는 가락지와 신고있는 신을 봐야합니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늘 성실히 섬김을 다해 온 첫째는 갈아 입어야 하는 더 좋은 옷도 손가락에 끼워야 할 반지도 그리고 신발도 필요치 않았습니다.

이미 모든것은 자신이 누리고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보기 전에 둘째의 패역함만 생각하니 그에게는 분노와 서운함이 가득한 것입니다.

자신이 입은 옷과 가락지와 신은 신발은 이미 기쁨의 잔치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음에도 들어가 그 기쁨을 함께 누림이 아니라 노함이 가득한 상태입니다.

이에 아버지는 첫째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먼저 첫째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야기하기를,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둘째는 잃었다 얻게 된 존재로서의 기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오.

결론은 둘째를 축하해주는 것이 마땅하다가 아니라 그로인해 우리가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는 늘 곁에서 섬기는 첫째가 큰 기쁨인 동시에 잃었다 되찾은 둘째도 아버지에게는 기쁨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은 과연 어떤 기쁨이 더 크고 좋은 것이냐가 아니라 어떠한 기쁨이라도 함께 참여하여 나누고 누리는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잃어버린 둘째가 아픔이었는데 다시 찾게되어 기쁨이 듯 늘 함께 있는 첫째가 자리에 있어야 완전한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잃었던 아들을 다시 찾은 것 이상으로 아버지는 항상 곁에서 섬김과 순종을 다하는 아들을 향한 믿음을 의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흔 아홉마리의 남겨진 양들에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잃어버린 한마리의 양을 찾아 떠날 수 있었던 목자처럼, 첫째를 향한 아버지의 신뢰는 변함이 없었기에 잃어버린 둘째를 다시 얻게 된 기쁨을 함께 누리자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왔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눅15: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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