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6월 28일 일요일
뉴스홈 종교
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짐승이 가진 능력'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8-23 23:00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짐승이 가진 능력(요한계시록 13:1∼10)

[1]
<13장>의 전체적인 흐름은 <12:18>과 이어지며 <12:13∼18>과 평행을 이룹니다. <13장>에는 사탄에 속한 진영의 존재, 사탄의 하수인 격으로 나타난 두 짐승이 나옵니다. <12장>에서는 붉은 용이 여자와 그녀의 후손을 핍박했는데, <13장>에서는 그의 부하인 바다의 짐승(1∼10절)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11∼17절)이 하나님의 백성을 박해하고 미혹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기본 골격은 요한 때 유포됐던 네로의 전설과 관련이 많습니다. 네로가 죽은 게 아니라, 로마제국의 동부전선에 대치하고 있던 파르티아제국으로 도주했고, 언젠가는 다시 로마로 돌아올 것이란 소문이 로마제국에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이런 소문 내용을 그는 다양하게 <요한계시록>에 인용했습니다. 그가 네로라는 이름을 직접 거명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는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소재입니다.

[2]
바다에서 짐승 하나가 올라오는 걸 요한이 봤습니다(1절). 바다는 <11절>의 땅과 더불어 온 세상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으로 “뿔이 열”이란 건 많은 권력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뿔은 힘ㆍ권력ㆍ능력 등을 상징했고, 성전 제단에 있는 뿔은 하나님의 구원 능력을 나타냈습니다. “머리가 일곱”이란 건 상당한 지식이나 이론으로 무장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17:9∼13>은 일곱 머리를 일곱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일곱 왕을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고려해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 메데파사(페르시아), 헬라로 이어진 다섯 제국과 그 뒤 유다를 지배했던 로마제국, 앞으로 나타날 적그리스도가 통치하는 나라를 일컫는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하나님의 뜻에 반대하는 유무형 제국의 수는 일곱보다 더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이를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모독하는 현대의 온갖 인본주의 철학으로 이해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3]
짐승이 입은 상처에 대한 언급을 요한은 <13장>에서 세 번 반복했는데(3ㆍ12ㆍ14절), 그는 이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빗대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에 의해 알려진 구원과 종말의 비밀, 작은 심판이 이미 시작됐으나 마지막에 이뤄질 큰 심판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게 사탄을 통해서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짐승은 치명상을 입고 예수님과 비슷하게 행동하며(3절) 성령님의 사역인 것처럼 위장해 사람들을 미혹했습니다. 그런데 “치명상을 입었다, 죽게 됐다”란 표현은(3절) <5:6>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묘사와 다릅니다. 요한은 이 짐승이 “살아났다”라고 함으로써(14절) 짐승의 회복을 예수님의 부활과 병행시켰지만, 그분과 달리 짐승은 완전히 죽은 게 아니라 치명상을 입었을 뿐입니다(3절). 따라서 짐승의 부활도 예수님처럼 참된 부활이 아닙니다. 그는 짐승이 입은 치명적인 상처를 예수님의 죽음에 빗대 설명했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걸 기독론적 풍자(Christological parody)라고 하는데, 여기서 짐승에 대한 우주적 경배는 어린양에 대한 우주적 경배와 병행을 이룹니다. 또 용이 짐승에게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부여한 건(4절a) 하나님이 권세와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을 수 있는 권한을 예수님께 주신 것과 병행을 이룹니다(4ㆍ8절 Vs 5:8∼14). 이는 북한의 주체사상이 수령-당-인민이라고 해서 삼위일체신론의 골격을 가져다가 삼위일체신론처럼 만든 것과 비슷하고, 사이비ㆍ이단 교주들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거짓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4]
요한은 짐승이 입은 치명적인 상처를 표현하면서 언어유희를 썼습니다. “상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플레게인데, 이는 치명적인 상처를 뜻하는 일상용어입니다. 같은 단어를 하나님의 심판으로서의 “재앙”을 말하기 위해 그는 <요한계시록>의 여러 곳에 썼습니다(9:18ㆍ20; 11:6; 15:1ㆍ6ㆍ8; 16:9ㆍ21; 18:4ㆍ8; 21:9; 22:18). 이런 언어유희를 통해 그는 짐승에게 주어진 치명적인 상처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13장>에는 짐승이 언제 상처를 입었는지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12장>과 <요한복음>을 통해 이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리고 <12장>에 나온 예수님의 승천으로 하늘에서 쫓겨나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사탄과 짐승은 운명 공동체입니다. 사탄이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는데, 짐승 혼자서 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사탄에게 준 치명적인 상처가 짐승에게도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5]  
치명적인 상처에서 회복된 짐승은 “큰소리를 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입을 받고, 42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았습니다(5절). 이건 <11:2>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비유대인에게 짓밟히는 기간이요, <11:3>에서 두 증인이 예언 사역을 수행하는 기간입니다. 또 <12:6ㆍ14>에서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가 광야에서 용의 공격을 피해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 기간입니다. 이 네 경우를 비교해 보면 이상한 모순이 발생합니다. <11:3>에서 두 증인은 42달 동안 제사장의 권한을 부여받고 복음을 증언하는 사역을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42달이 지나 사역을 마칠 때 짐승이 아비소스에서 올라왔습니다(11:7). 이는 42달 동안 짐승이 아비소스에 갇혀 있었다는 말입니다(20:3). 이처럼 짐승은 아비스소에 갇혀 있는데 요한은 왜 <5절>에서 짐승이 42달 동안 활동한다고 했을까요? 짐승만이 아니라 <11장>에서 42달 동안 이뤄지는 두 증인의 사역과 <11:2>의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12:6ㆍ14>의 광야로 도망친 여자의 은거 기간도 서로 충돌합니다. 두 증인, 거룩한 도시 예루살렘, 여자는 모두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한 사건에서 교회는 42달 동안 제사장 같은 권한을 가졌고, 다른 사건에서는 핍박받는 사람 혹은 도망자와 같은 초라한 모습이었습니다. 

[6]
짐승은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결박당해 아비소스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탄이 우리를 밀처럼 체질하려고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고(누가복음 22:31), 사탄이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찾아다닙니다(베드로전서 5:8).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류 구원의 큰 그림이 완성됐지만(요한복음 19:30), <요한계시록>에 나온 사탄/짐승은 42달 동안 왕성하게 활동했습니다. 사탄/짐승은 교회를 상징하는 여자를 핍박했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했습니다. 사탄/짐승의 활동은 이처럼 양면성이 있는데, 이는 예수님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말세가 도래했으나, 그분의 재림으로 완성될 종말을 기다리고 있는, 말세와 종말의 긴장 가운데 놓여 있는 해 아래 세상에서 성도가 늘 겪는 일입니다. 사탄/짐승은 특정한 때에만 활동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도성이 짓밟히는 42달, 두 증인이 예언하는 기간, 그리스도의 탄생에서 재림까지 전 기간이 사탄/짐승이 활동하는 기간입니다. 그래서 이미 도래한 말세의 관점으로 보면 사탄/짐승은 결박을 당했지만, 종말의 완성을 앞둔 관점으로 보면 사탄/짐승의 잔당들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7]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 사탄/짐승의 이중적 위치는 교회의 입장과 밀접하게 연관이 있습니다. 사탄/짐승이 결박당했다는 관점으로 보면 교회는 왕과 같은 모습을 갖습니다. 그러나 사탄/짐승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맥락으로 보면 교회는 고난과 핍박을 당합니다. 또 반대의 상황도 성립합니다. 교회가 성(盛)하면 사탄/짐승은 쇠(衰)하고, 교회가 쇠하면 사탄/짐승은 성합니다. 시소게임 같은 교회와 사탄/짐승의 관계는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열쇠 중 하나입니다. 교회의 이중적 모습과 사탄/짐승의 이중적 모습이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교회의 이중적 모습은 예수님의 모본(模本)을 따르기 위한 것이지만, 사탄/짐승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처럼 약한 모습으로 죽임당했지만, 그 방법으로 유다지파의 용맹한 사자가 돼 승리했습니다(5:5). 예수님의 모습이 교회의 특성에 그대로 반영됐기에 교회는 그분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악을 이깁니다.

[8]
<12:10>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을 해칠 수 없는 위치로 떨어졌습니다. 저들이 하늘에서 쫓겨났기에 더는 하나님의 백성을 참소할 수 없습니다. 사탄/짐승이 하늘에 사는 이들을 훼방해도 그건 무위로 끝났습니다. 그래서 저들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마수의 손길을 뻗쳤습니다. 이처럼 사탄이 육체적으로는 성도를 죽일 수도 있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뿌리를 둔 기독교 신앙을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정조, 영원한 생명은 저들이 절대 손댈 수 없기에 진정한 승리를 사탄/짐승은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성도가 짐승에게 패한 것처럼 보이고, 짐승이 먼저 이긴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이것에 속으면 안 됩니다. 골인 지점을 통과했어도 최종 결과는 전광판에 발표될 때 나옵니다. 전광판에는 성도가 승리자로 나오고 짐승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 실격패했다고 나옵니다. 예수님이 승리했고 성도는 그분처럼(5:5∼6), 죽음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는 법을 알고 있기에 최종 승자가 됩니다(12:11∼12). 예수님의 길을 걷는 한 성도가 짐승을 이깁니다.

[9]
짐승이 하나님의 허락도 없이 성도를 이길 수 없습니다(7절). 짐승이 아무 때나 자기 마음대로 성도를 이긴다면 누가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그래서 <7절>의 표현처럼 성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께 허락받은 짐승만 성도를 이깁니다. 그것도 정해진 기간만큼만 이깁니다. 이렇게 하면서 저들은 모든 종족과 백성과 언어와 민족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하나님께 허락받고 세상을 미혹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저들의 죄악이 주님께 벌을 받을 만큼 커지도록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저들의 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을 때 저들을 심판하십니다(창세기 15:16, 로마서 1:24ㆍ26ㆍ28). 이걸 모르고 사람들은 악인이 어떻게 저렇게 잘 살 수 있느냐고,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호들갑을 떱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욕심에 사로잡혀 용과 짐승을 경배합니다. 요한은 <17:17>에서 <7절>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설명했습니다.

jso8485@naver.com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실시간 급상승 정보

포토뉴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