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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정제일교회 이준효 원로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아침에 나로 하여금 주의 인자한 말씀을 듣게 하소서 내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내가 다닐 길을 알게 하소서 내가 내 영혼을 주께 드림이니이다"(시편143:8)■
(히브리서 10장 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므두셀라의 아들 라멕은 777세에 생을 마감했지만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은 후 아들 라멕보다 5년을 더 산 782년을 살다가 노아 홍수가 일어나던 해까지 969세를 향수했습니다. 모든 인류 가운데 최장수 인생의 자리를 오늘까지도 빼앗기지 않고 고수하고 있으면서 여전히 종말론적 심판의 나팔수가 되고 있습니다.
"창을 던지는 자"라는 뜻을 지녔는데, 이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시 부족과 부족 사이에 오늘의 전쟁으로 묘사될 수 있는 싸움이 피할 수 없는 생존력이 되었는데, 그 싸움에서 창을 던지는 자가 죽으면 그 부족이 패전하여 멸문을 당했다고 합니다(지식백과).
삼백 년 동안이나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에녹이 아들의 이름을 이런 의미의 "므두셀라"라고 지은 것은 결국 아들이 죽는 해에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의 예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의 손자 라멕이 그토록 경건한 신앙을 견지했었어도 당시의 관영한 죄악상을 어거치 못했습니다. 잊지 말아요.
오늘 묵상할 말씀은 신앙 공동체에 대한 저자의 신학 중심이 아주 이상적인 모습으로 잘 반영되어 나타나는 바, 그리스도의 유일한 희생 제사가 미칠 전무후무한 영향력이 개인에서 공동체로, 예루살렘에서 유대 전역으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끝까지로, 제한된 시공간에서 시공을 초월한 우주적 전 역사에로의 전환을 시사하는 내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옛 언약 안에서 인간 제사장이 드렸던 모형론적 희생 제사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성결과 정결을 목적으로 대제사장에 의해 거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저자가 형제라고 부르는 신앙의 공동체는 유대인 개종자들로 시작되었지만, 개종자의 개념이 확대 해석되어 예수의 피로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형제, 곧 전 공동체를 암시합니다.
저자는 바로 그 공동체 앞에 새로운 살 길이 휘장 가운데로 열렸음을 형제와 우리에게 천명합니다. 이와 같은 천명은 나사렛 동네에 나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는 형제들과 우리, 곧 모든 자들이 담력을 얻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 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과 또한 이 긴밀한 관계성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의 양태로 확산된 점입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저자를 통해 우리 신앙 공동체의 역할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그 첫째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22절), 그 두 번째는 우리 신앙 공동체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는 것이고(23절), 그 세 번째는 우리 공동체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그날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힘쓰는 것(24, 25절)이라고 요약합니다.
종합적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지체들로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한 몸인 것을 기억하여 상호 간에 영적 상태를 자세히 살펴 그 누구도 넘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강조입니다. 당시 신앙의 배교와 박해가 공존했던 상황 아래서 이 같은 강조는 당연했습니다. 불신과 유혹의 사조가 난무한 세상이라는 관점에서 반드시 새겨야 할 대목입니다.
마틴 부버(Martin Buber)가 남긴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사실은 인간과 함께 하는 인간이다"라는 말을 남겨 공존 세계의 비전을 제시했지만, 오히려 '깨어진 세계'에서 서로 찢고 찢기고 또 자기 스스로를 찢으면서 분열되어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인답게 반듯하게 살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이 가장 먼저가 아닐까요? 그리고 사랑과 겸손의 띠로 하나가 되는 삶을 사는 것이 현재 시상이 되어야 함이 옳지 않을까요? "믿는 도리의 소망", 당시 상황이 오죽했으면 이를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으라고 했을까요? 문자적으로는 '우리가 고백하는 소망'입니다.
여기 이 "소망"은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과 연관된 것으로, 그 내용은 현재와 미래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곧 우리 기독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적 행위에 의해 약속하신 종말론적 구원을 온전히 성취하실 것을 의심치 말고 확신 가운데 바라보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오늘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이 약속 하나 붙들고 이 세상의 강을 도하하는 그대이기를 축원 드립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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