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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사랑교회 김규태 목사,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09-22 15:13

하늘사랑교회 담임 김규태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창세기 22:1-14
순종의 길에서 만나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

오늘 말씀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실 때는 언제고 다시 바치라는 것은 또 무슨 말인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백세에 낳은 아들이니 그 얼마나 귀하고 예쁘겠습니까? 하나님도 그 점을 아시고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이라고 말씀해 주실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랑스런 아들을 하나님께서 모리아 땅으로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하셨으니,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표현이 이스마엘을 내쫓을 때를 연상시킵니다.

그 때도 아브라함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하나님의 명령을 실행에 옮겼습니다(21:14). 좀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때 아브라함은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매우 근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브라함이 근심했다는 표현이 없습니다.

더 놀라운 점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반응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반대질문을 던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아브라함은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을 뿐입니다.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안장을 지우고…이삭을 데리고…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일어 주신 곳으로 가더니…눈을 들어…멀리 바라본지라(3-4절).”

아브라함은 아무런 대꾸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냄도 없이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행하고,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었을 뿐입니다. 그는 이삭과 함께 삼일 길을 걸었습니다. 삼일 동안 아브라함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궁금합니다.

드디어 삼일 째가 되자, 아브라함은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보았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한 곳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잘 순종해서 왔는데, 막상 아들 바칠 곳을 멀리 바라보니 아버지 아브라함의 마음이 흔들리지는 않았을까요? 지금이라도, “미안하다. 애비가 잘못 생각했다! 다시 돌아가자!”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종들과 나귀를 그곳에 남겨두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웬함(G. Wenham)의 설명대로, 독자 이삭을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아이”라고 부르면서 최대한 초연해지려고 노력했습니다(생명의 삶 플러스, 2022년 9월호, 108).

이후 아브라함은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고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여기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함께”라는 단어 말입니다. 네, 아브라함은 지금 아이와 함께 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이와 함께 제단을 쌓을 곳을 가서 예배하고, 혼자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돌아올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듯이, 아브라함도 아이와 함께 할 것입니다. 물론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도 아이와 함께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손에 불과 칼을 들고 걸었고, 이삭은 번제 나무를 짊어지고 걸었습니다. 이삭은 차마 자신이 번제할 어린양을 대신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겠지요?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물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내 아들아 여기 있노라.” 이후 아들의 질문에 아버지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은 “함께” 나아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윽고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러주신 곳에 이르자, 아브라함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자, 여호와의 사자가 황급히 그를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이번에도 아브라함이 대답했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순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들, 이삭에게 아브라함은 아버지가 되듯이, 아브라함에게도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들,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순종하였듯이, 아들, 아브라함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알지 못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아브라함은 응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내 아들아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맞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항상 아들 곁을 지켰고, 하나님도 항상 아브라함의 곁을 지켰습니다. 저는 이것을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아들이 부를 때, 아버지는 아들의 곁에서 응답합니다. 아들은 그런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합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아들 대신 번제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시간이 지난 뒤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씀 앞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 보다는 묵묵히 행동으로 그분을 따르는 삶이 얼마나 축복된 일인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후대 사람들에게 “함께”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교훈해 주었을 것입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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