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4월 30일 화요일
뉴스홈 종교
킹스채플교회 이광형 목사, '시몬에서 베드로까지'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2-11-09 16:06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시몬에서 베드로까지
(마 16:18)

'네가 만약 괴로울 때면 내가 위로해 줄께'
'네가 만약 서러울 때면 내가 눈물이 되리'

가수 윤복희씨가 부른 노랫말 이죠.

여러분은 괴로울 때 누가 위로해주고 있습니까?

서러울 때 누구의 위로를 기다리십니까?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행3:6)

방금 읽은 말씀은 태어날 때부터 걷지 못하여 늘 앉은채로 살아가던 사람을 베드로가 일으켜 걷고 뛸 수 있게한 내용입니다.

죄송하지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개혁한글성경 버전에서처럼 앉은뱅이라 표현해보겠습니다.

절대로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을 조금 더 이해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이니 오해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세상에는 안타깝게도 신체적 장애로 인하여 걸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지만, 육신은 멀쩡한 가운데 영적장애로 인하여 일어설 수 없고 걷지 못한다 하는 사람들도 매우 많습니다.

스스로를 앉은뱅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경우도있고, 일어서고 싶고 걷고 뛰고 싶은데 무엇인가 어깨를 짖누르는 것 같고 다리가 땅에 묶인 것 같아 일어서려다 주저 앉기를 반복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젠가 여러분을 일으켜 줄 베드로를 기다리며 늘 앉은뱅이와 같은 인생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아니면 세상이 바라볼 때 혹 쥐뿔도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여러분을 바라 보실 때 오늘도 변함없이 여러분에게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여 일어나고 더 나아가 그 이름으로 앉은뱅이 된 사람을 일으키켜주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라십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하기를 겸손함의 반대(oppose)는 교만이라고 하지만 겸손의 반대는 교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겸손함의 반대는 교만함이라고만 여기는 탓에 많은 사람들이 교만하지 않기 위하여 모든 일에 지나친 겸손을 앞세우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믿음에서조차...

물론 겸손한 믿음이어야 하는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일을 두고 겸손과 교만의 경계선에서 그것을 분별하고 확신하지 못 함으로 늘 갈등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겸손의 반대는 단지 교만이라는 인식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다시 말씀드리지만 겸손의 반대(oppose)는 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만은 겸손함과 상극(incompatibility)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겸손함의 반대는 무엇이겠습니까?

말씀드린대로 겸손하지 못함 입니다.

놀라운 것은 교만은 언제나 강팍함을 뿜어 내듯이, 겸손하지 못함에는 겸손한 것 같은 모습을 드러내려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겸손한것 같지만 결코 겸손이 아닙니다.

실상은 겸손을 위장하여 참 된 겸손과 교만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속임수라는 사실을 인식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겸손하게 나갔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곳에 서기 위하여 말씀하신대로 순종하여 신을 벗고 그 앞에 섰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산에서 그것도 산책로로 잘 다듬어진 길도 아니고 무엇이 밟힐지 모르는 곳에서 신을 벗고 걸어가 선다는 것은 어쩌면 위험한 일입니다.

돌 부리에 발이 치이거나 날카롭게 선 풀이 신을 벗은 모세의 발바닥을 찌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있는 곳이라고해서 갑자기 그 길이 맨들 맨들하고 반짝이는 대리석을 깔아 놓은 듯 잘 닦여진 장소로 변화하는 것은 아닙니다.

광야는 그대로이고 산도 그대로인 그 곳에서 하나님은 임재하셨습니다.

거룩하게 변하고 임재하시기에 준비된 산이라서 하나님이 임재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기에 거친 산은 거룩한 산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신을 벗으라는 말씀에 모세는 자신의 신을 벗고 하나님의 임재함이 있는 곳에 섭니다.

그러나 신을 벗는다는 것은 단지 발에 신고 있던 신만 벗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가지고 있던 생각과 알고있는 지식, 삶의 방식과 심지어는 가치관 마저 벗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재하심을 엎드려 맞이하는 것이고 거룩하심 가운데 서는 것이며 참 된 겸손의 모습을 보이며 신을 벗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참 된 겸손의 모습으로 신을 벗고 거룩한 주님의 임재 앞에 선 모세가 보내시려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그는 겸손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부르심에 겸손했기에 보내심에도 더 겸손하리라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된 겸손을 보였던 모세가 보내시는 자리에서 겸손 한 것 같은 모습만을 보인 것입니다.

마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을 부인하는 것처럼 겸손의 모양만 가지고 순종을 부인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를향해 '그정도만 겸손하면  됐다' 라고 하신것이 아닙니다.

겸손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를 향해 하나님은 겸손을 언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모세에게 교만하다 하시지도 않았습니다.

당시 모세와 하나님의 대화를 함께 찾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모세가 겸손하게 보이는 듯 한 이야기가 있는데 같이 찾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장 11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모세는 자신의 처지 뿐 아니라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모세 자신은 애굽인을 죽인 살인자로 도망치고 숨어 지내온 광야의 야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가라' 는 하나님의 말씀에 '저는 자격도 능력도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모세에게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다음 12절을 계속 읽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내가 누구이기에...'  라는 모세의 의문에 하나님은 단지 '너는 할 수 있어' 로 답하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라고 하며 앉은뱅이로 또 다시 주저 앉으려는 모세를 향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래서 모세는 예전의 모세가 아닙니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주저 앉을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니 너는 일어나서 가라'

하나님은 모세의 잠재력을 보고 애굽 왕 바로에게 가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계실 것이기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계속해서 출애굽기 4장10절~12절을 찾아 읽어보겠습니다.

먼저 4장10절을 보겠는데요, 이것은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4:10)

다음 11~12절입니다.
이것은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1~12)

가서 전하라는 말씀 앞에서 자신의 입이 뻣뻣해 말이 어눌할 것을 걱정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일깨워 주셨을 뿐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것이 바로 모세가 가지고있던 상처가 아니겠습니까?

애굽의 왕자로 있던 시절. 

잘나가는 듯 한 모세의 인생에 역경의 그림자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모세가 자신의 동족인 히브리인을 학대하던 애굽인 관리를 죽였을 때입니다.

아무리 애굽의 법을 이야기 하더라도 어쨌든 모세는 당시 애굽의 왕자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상황에서 애굽 왕자의 신분으로 애굽인 관리를 죽였다고 처벌을 받으면 얼마나 큰 처벌을 받겠습니까?

또 얼마든지 모세는 그 사건에 대해서 항변하고 죄 값을 치르고 넘어가거나 무마 시키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 앞에서 실토한대로 입이 뻣뻣하고 둔하였기에 그 사건에 대하여 스스로를 위해 정치적으로나 합리적으로 변호하지 못하고 그저 살인자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단 한순간의 판단 착오로 자신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여기며 그동안 애굽의 왕자로 앉아있던 높은 자리에서 내려와 광야 촌 구석에 자리를 깔고 앉아 지내는 스스로를 때때로 비관하게 되는 날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때 입만 뻣뻣하지 않고 혀가 둔하지 않아서 말만 잘하였더라면...'

모세는 그 당시 뻣뻣한 입으로 말을 잘 하지 못 하였기에 지금 이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된 자신을 탓하며 자신을 앉은뱅이라고 여기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혀가 둔하여 말을 잘 못 한다는 것은 평생 자신이 안고 살아가는 상처일 수 밖에 없음을 가슴 깊이 묻어두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가장 먼저 자신의 최대 약점이자 오랜 상처를 언급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방법을 보십시오.

상처를 드러내며 자신의 약점이 무엇인지 말씀드렸더니 하나님은 그 상처를 완전히 고쳐주시고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뻣뻣한 입를 풀어주시고 둔한 혀를 만져주셔서 말을 잘 못 하던 모세가 탁월하고 뛰어난 언변 능력을 갖추게 하신 후에 이제 다 됐으니 가라고 하신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모세에게 큰 능력을 부여해 주신 후에 가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전의 모세가 아니어야 할지라도 아직 모세는 모세입니다.

이제 충분한 자격이 있어보이고 놀라운 능력으로 충전되고 드러나 보이기에 일어서고 충만한 능력에 휩쌓여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말씀에 의지하여 먼저 일어나고 가라고 하신 곳으로 가고 전하라 하신 말씀을 전할 때, 모세 자신 뿐 아니라 애굽 왕 바로를 포함해 모세를 바라보는 모든 시선들이 예전의 모세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여기에 순종하는 것이 겸손이고 믿음입니다.

늘 말씀 드리지만, 홍해를 갈라주셔야만 건너가리라는 생각으로 기도만 하고 기다리는 것은 어쩌면 믿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과 믿음의 줄다리기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양보하시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아직 갈라지지 않은 바닷 길일지라도 들어가라는 말씀이 있다면 먼저 물에 발을 담그고 죽을 것 같이 괴로울지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일으켜 세우시고자 하실 때  여러분의 오랜 상처를 먼저 다 해결해 주신 후에야 일어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지 마십시오.

모세 역시 '상처가 다 고쳐지고 해결되어야 일어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드렸지만 들려온 하나님의 답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이 후 모세의 모습을 보십시오.

애굽 왕 바로 앞에 선 그가 말을 잘 못해서 쫒겨난 적이 있습니까?

오히려 애굽왕 바로는 뻣뻣하다고 했던 모세의 입술을 통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모세는 자신의 상처가 다 회복 되었기에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신의 최대 약점이자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숨겨 놓았던 자신의 상처를 밟고 일어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상처와 약점은 가슴 깊이 보이지 않는 곳에 묻어두고 가리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밟고 일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깊은 곳에 묻어 두니까 그 무게가 무거워 주저 앉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밟고 일어서라 하십니다.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십니다.

말을 잘 못 한다던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며 수 백만의 백성들 뿐 아니라 지금 성경을 읽는 모든 크리스찬들에게 하나님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변화 되지 않았습니까?

살인자요 도망자로 광야에 주저 앉아 살아야하는 줄 알았던 모세가 수백만의 백성들을 앞에서 이끌고 걸어가는 지도자로 서게 된 것 아닙니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라고 했을 때, 왜 당장 일어나는 것이 불가능한지를 의학적으로 또 심리적으로 설명하고 거기에 동조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말씀에 의지하여 일어나면 됩니다.

그래야 걷기도하며 뛰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앉아있던 모세를 일으켜 세워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더 이상 앉은채로 조용히 숨어 살아가는 인생 아니라 일어나 걷고 뛰는 인생으로 들어서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누구이기에' 라는 겸손 한 듯 보이는 자세로 다시 주저 앉으려는 생각을 버리고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라는 말씀 앞에 담대히 일어서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을 벗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내가 누구이기에' 라는 겸손함으로 살아오셨을 지라도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신다면 이제 일어서십시오.

'다리에 힘이 없다.'
'오랜 시절 앉아있어서 일어서기가 어렵다.'
'오히려 앉아있는 것이 이제는 더 익숙하다'

'내가 누구이기에'

결코 여러분은 앉아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임을 이미 성경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지금 이시간도 자신의 삶을 앉은뱅이와 같은 인생이라 여기시는 분이 계시다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그 자리는 여러분의 자리가 아닙니다.

일어나 걷고 뛰며 주님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에 반해 애굽왕 바로는 교만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에게 있는 교만은 단 한 번도 겸손을 용납한 적이 없었고 겸손함을 드러내고자 한 적도 없었습니다.

오직 강팍함을 앞세우고 강팍함의 수위만 조절 할 뿐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향해 늘 강팍함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겸손은 단순히 교만의 반대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한 상극입니다.

겸손함의 반대는 겸손하지 않은 것입니다.

겸손하지 못한것은 깨닫고 돌이켜 참 된 겸손을 회복할 수 있지만, 교만은 강팍함을 깨뜨리고 철저히 버리지 않는 한 겸손의 자리에 서기를 거부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겸손과 상극인 교만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함의 반대인 겸손하지 않음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있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바라봐 주시기를 바라십니까?

이에 대하여 모세 뿐 아니라 베드로의 모습을 살펴보며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 요한의 아들 시몬, 바요나 시몬'

이것은 성경이 언급하고있는 베드로를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

그는 늘 그렇게 불렸습니다.

예수님도 항상 그렇게 부르셨습니다.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

베드로를 처음 만나시고 베드로와 함께 생활하실 때에도,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베드로를 다시 만난 갈릴리 호숫가에서도 주님은 그리 부르셨습니다.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요21:15)

주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요한의 아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어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시몬에게 주심은 그에게 이름과 더불어 권세와 능력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마16:18~19)

그래서 그는 앞으로 베드로로 살아가야합니다.

지금까지 시몬의 인생을 살아왔지만, 앞으로 그의 삶은 베드로의 인생이 되어야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고 시몬이라는 이름은 버리고 살아가라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사울이 사도 바울로 살아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바울은 사울로 살아왔던 지난 모든 시절을 철저히 버리고 거듭나야했기에 그는 더 이상 사울이 아닌 바울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베드로가 되기위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으로서의 모든 삶을 깨끗히 지워야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시몬이라는 이름에서 베드로로 이름을 바꾸라 하신것이아니라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하신 것입니다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막3:16)

그래서 성경은 주님을 만나고 회심한 바울을 더 이상 사울이라 부르지 않았지만, 베드로는 시몬 베드로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 있어서 시몬이라는 이름은 어쩌면 힘없고 나약한 한 인간의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반석이 되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믿음의 이름인 반면에, 시몬이라는 이름은 늘 밀까부르 듯 하려 청구하는 사단의 괴롭힘에 두려워 할 수 밖에없는 연약한 이름입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눅21:31)

그럼에도 성경은 베드로를 시몬 베드로라 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를 향해 시몬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이어야합니다.

베드로 자신도 스스로를 시몬이라 소개해서는 안됩니다.

시몬 이지만 더해주신 이름 베드로 곧 시몬 베드로임을 알리고 베드로답게 살아가야 마땅한 것입니다.

베드로를 향해 '시몬아, 요한의 아들 시몬아'라고 부르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왜냐하면 시몬의 연약함을 아시고 시몬으로서의 나약함을 만져주시고 위로하시고 안아주시며 일으켜 회복시키실 분은 오직 예수님 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과 죄책감속에서 스스로의 연약함에 한 숨 지으며 사람 낚는 베드로가 아닌 물고기 낚는 시몬으로 다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그를 찾아 오신 주님은 그의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이것은 시몬의 연약함을 주님이 아시기에 그 연약함으로 입은 상처를 어루만지시는 사랑의 음성입니다.

그렇게 어루만지시며 회복시키시는 주님은 시몬에게 다시 베드로서의 사명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결코 실의에 빠진 나약한 시몬의 모습으로는 주님의 양을 먹일 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 해 주신 주님은 늘 시몬이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시몬 베드로가 언제나 주님의 사랑과 은혜 , 보다 더 가까운 친밀감 속에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 뿐 아니라 세상에 증거하신 것입니다.

나약한 시몬의 인생 뿐 인줄 알았던 베드로는 이 후 밀까부르 듯 하는 마귀의 괴롭힘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 없는 베드로의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그는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여러분.

오늘날에도 시몬은 무수히 많은 반면에 베드로가 보이지를 않습니다.

너도 나도 그저 시몬의 인생으로 만족한다는 듯이 스스로를 연약한 시몬이라고 소개하고 살아갑니다.

늘 시몬으로 시몬처럼만 살아가는 것. 
그것이 겸손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여러분을 시몬이라 부르시는 분은 주님이시지 여러분 스스로가 그리 소개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사탄도 아닙니다.

주님이 시몬이라 부르심은 일으켜 세우기 위한 사랑의 음성인 반면에, 사탄은 밀까부르 듯 하려는 계략으로 '너는 시몬일 뿐이야'라고 속삭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나약함을 스스로 소개하고 물러서려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연약함은 주님이 아시고 주님만 아시면 됩니다.

저 역시 주님이 목사로 세워주셨기에 주님이 세워주신 종으로 이 자리에서 담대히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만일 제가 '아무리 그래도 저는 연약하고 입이 둔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라는 마음과 생각으로 가득하다면 누가 그것을 겸손이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목사도 지칠 때도 있고 힘겨울 때도 있습니다.

내가 만약 괴로울 때면 누가 위로해줄까?

설교 초반에 무리수를 두고라도 한 소절 부르지 않았습니까?

어쩌면 이따가 집에가서 한 마디 들을 각오로 부른거에요.

그런데 제가 부르고 싶어서가 아니라 직접 노래 한 소절을 부르게 하시기에 정말 담대히 부른 것이라는 사실을 아셔야합니다.

주님의 말씀으로 일어나 일하던 중 지치고 힘들다 여겨지는 그 순간 주님이 찾아오시고 저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그런데 그 때 주님이 뭐라고 부르시는 줄 아십니까?

"킹스채플교회 담임목사야~"
"드누보 대표야~"
라고 부르시는 것이아니에요.

실의에 빠진 베드로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베드로야' 가 아니라 '시몬아' 하고 부르심 같이,
낙심의 웅덩이를 보고있는 저에게 '광형아', '아들아' 라고 부르시며 다가 오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한 겸손은 '저는 시몬에 불과합니다' 라는 주장이 아니라 '네 주님 내가 주를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십니다' 라는 대답을 했다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베드로로 일어서는 것입니다.

'상처 다 치유해주시면 다 낳은 후에 일어설테니 기다려 주십시오'가 아닙니다.

주님은 연약함에 낙심하고 다시 물고기나 잡고자하는 또 다른 시몬이 숨은 갈릴리 호수를 반드시 찾아가십니다.

하지만 그 호수에서 여러분과 물고기 잡으며 매 번 시몬이기만을 이야기하는 여러분과 항상 계시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큰 오산입니다.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며 살 수밖에 없었던 앉은뱅이 된 사람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했을 때 그가 일어나기를 거부하고 계속해서 앉아만 있었다면 걷고 뛰는 은혜와 기적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믿고 일어날 때까지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서 기다리며 늘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성전 미문은 이제 일어나 걷고 뛰어가야 하는 곳이지 앞으로도 계속해서 앉아 지내야하는 장소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갈릴리 호수는 여러분을 일으키기 위한 장소이지 터잡고 살아가기위한 곳이 아닙니다.

당신이 누구이든 시몬의 이름을 버리지는 마십시오.

그러나 그 이름을 스스로 여러분의 삶에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하나님이 부르시고 찾으시도록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제 일어나 베드로로서 여러분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루어 가시기 바랍니다.

예전에 여러분처럼 주저앉아 지내는 누군가를 향해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고 일으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주님의 말씀따라 오늘 반석위에 세워진 사람입니다.

결코 음부의 권세가 여러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십시오.

여러분이 들어야 할 것은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겸손한 것 같아 보이는 연약한 말도 세상이 당신에게 들려주는 현실적인 말도 아닙니다.

오늘도 또 다시 여러분에게 이야기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합니다.

"너는 베드로라"
"음부의 권세가 결코 너를 이기지 못하리라"

그리고 가끔 지치고 힘들어 주저앉으려 할 때도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합니다.

"사랑하는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먹이라'

당신은 오늘 주님 앞에 세워진 베드로입니다.

주님의 이름 위에 세워지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이 당신 안에 있는 한 결코 음부의 권세가 여러분을 해하거나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한 숨 내 쉴 때 주님이 품에 안아주시는 시몬입니다.

시몬이기에 주님은 당신을 회복시키시고, 베드로이기에 주님은 당신을 가라하십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jso8485@naver.com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실시간 급상승 정보

포토뉴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