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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사람들이 행한 대로!'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3-01-31 17:03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사람들이 행한 대로(요한계시록 20:7∼15)

[1]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하나님이 바꾸시지 않기로 정해 놓은 길과 심판은 그대로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님의 은혜를 받은 크리스천은 종말을 대비해 뚜렷한 생사관(生死觀)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에게 한 번 죽는 일은 정해진 것입니다(히브리서 9:27∼28). 따라서 성도는 종말을 대비해 ‘죽음의 질(質)’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기에(누가복음 20:38), 인간이 죽는다는 건 육신의 시각으로만 인간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보면 인간은 사라질 뿐이고, 마지막 날에 모두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게 됩니다. 육신이 없어졌다고 해도 크리스천이면 삼위일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냥 육신을 벗어나 생명의 부활을 준비하고 있는 존재입니다(요한복음 5:29). 그러므로 성도는 반드시 육신의 죽음 이후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성도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주님이 허락한 고난은 그걸 이겨낼 수 있도록 성령님이 인도한다고 했는데(고린도전서 10:13), 죽음에 관해서도 이 말씀이 적용되기에 자신의 종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게 이 책에서 말한 개인적인 종말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2]
천 년이 찼을 때 사탄이 감옥에서 풀려나와 땅의 사방에 흩어져 있는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해서 전쟁을 벌이려고 모으는데(7∼10절) 저들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습니다(7∼8절). <17∼19장>에서 하나님이 큰 도시 바빌론을 심판하셨지만 <20장>에서도 사탄은 등장합니다. 이전에는 사탄이 천 년 동안 사람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갇혀 있었지만(20:3), 풀려나기가 무섭게 다시 옛날에 했던 못된 짓거리를 합니다. 개 버릇을 남에게 못 준다고 사탄이 그 버릇을 남에게 주겠습니까? 그래서 사탄은 저가 넘어진 자리에서 또 넘어집니다.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7∼8절>과 <19:19∼21>에 나온 전쟁은 서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한 번의 전쟁으로 악을 소멸시키시는 강한 분인데(18:8), 바빌론의 심판에도 불구하고 <7∼10절>에서 전쟁이 반복되는 건 하나님이 한 번의 전쟁으로 사탄을 완전히 심판하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는 하나님이 사탄을 구치소에서 영원히 가둘 교도소로 옮기기 위해 잠시 구치소 밖으로 나오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3]
무천년설의 해석처럼 인간이 천년왕국의 기간을 문자적으로 특정할 수 없다면, 사탄이 옥에서 풀려나와 사람들을 미혹하는 건 진리가 다시 어두워지는 걸 의미합니다. 사탄이 감옥에서 나온다고 하는 건 저가 지옥을 탈출하는 게 아니라, 진리가 어두워진 틈을 타 악의 세력이 다시 해 아래 세상에서 날뛰는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사회마다 여러 가지 제도를 통해 악이 날뛰지 못하도록 만든 장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하나님이 개입하셔야 비로소 악이 제어됩니다. 그래서 악한 세력이 가장 적대시하는 게 하나님께 인류 역사에 개입해 달라고 기도하는 크리스천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운 것이고, 인간의 양심이 제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해 아래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기에 어둠의 세력이 가장 싫어합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은 늘 교회부터 망하게 하려고 덤벼듭니다. 

[4]
하나님이 사탄에게 민족들을 미혹하는 마지막 기회를 다시 주신 건 순교자들의 승리를 더 높이 드러내기 위함입니다(8절). 이는 <욥기>에서 욥을 괴롭힌 사탄으로 인해 욥의 순전함이 더 드러난 것과 같습니다. 짐승이 죽인 사람들은 종말적 신앙으로 산 크리스천이기에, 짐승의 통치에 반대하고 이걸 위해 고난을 겪었던 이들이 하나님의 심판 때 짐승이 했던 것보다 더 많이 세상을 통치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누리는 예수님 안에서의 승리도 영원합니다. 이걸 사탄이 다시 뒤집을 수 없다는 걸 알리기 위해, 이게 악에 대한 하나님의 마지막 말씀이라는 걸 밝히기 위해 악의 세력에게 주님은 마지막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나 사탄에게 다시 기회를 줘도 첫 창조세계의 타락 사건과(창세기 3장) 짐승의 통치는 재현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더는 사탄에 의해 침범당하지 않기에, 성도의 진(陣)은 뚫리지 않습니다(9절).

[5]
<에스겔서>에서 “곡과 마곡”은 회복된 예루살렘의 안전성ㆍ견고성을 시험하기 위해 등장했는데, 저들이 패퇴 당함으로써 하나님이 회복시킨 새 예루살렘의 안정성이 입증됐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 말씀을 <요한계시록>에 창조적으로 인용했습니다. 사탄이 동원한 “곡과 마곡”이 “성도의 진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도시”를 둘러쌌습니다. 여기서 “성도의 진”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도시”인 새 예루살렘은 동격으로 교회를 뜻합니다. 그런데 “곡과 마곡”을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소멸해 버렸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값을 치르고 세운 교회가 <에스겔서>에 나온 새 예루살렘만큼 견고하고 안전한 공동체란 뜻입니다. 

[6]
이 말씀을 읽고 현대의 곡과 마곡은 어디고, 누가 이 시대의 곡과 마곡인지 묻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주장처럼 현대에 곡과 마곡에 해당하는 장소ㆍ인물이 있다면 우리 후손들에게도 이에 해당하는 게 또 있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쓸 때 요한은 유대 묵시문학의 전통과 최후 심판, 창조 전의 일시적인 메시아 통치 사상(참조. 제2바룩 40:3, 제4에스라 7:28 이하) 등을 인용했습니다. 그리고 이때 그는 이 사상들을 기존의 것과 다르게 성경의 가르침에 맞춰 창조적으로 바꿨습니다. 그는 <잠언>에서 이집트의 지혜 사상을 인용했던 것처럼, 이 사상들을 복음적으로 바꾼 후 순교자들의 짐승에 대한 승리가 중요하다고 했고, 천년왕국의 이미지에 아주 구체적인 기능을 부여했습니다. 이처럼 그가 이런 걸 인용한 의도와 달리 “곡과 마곡”을 특정 지형이나 인물, 인류사의 특정 시기로 해석하면 천년왕국의 기능이 제한된 시간 속에 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계시는 우주적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걸 제한된 인간사 속에 묶어서 해석하면 안 됩니다.

[7]
곡ㆍ마곡과 함께 악의 세력도 짐승ㆍ거짓 선지자들이 있는 불과 유황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10절). 우리는 <요한계시록>에 나온 불과 유황의 바다가 어떻게 생겼는지, 그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잘 모릅니다. 크리스천이 알 수 있는 건 불과 유황의 바다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9∼10절>을 순차적으로 일어난 일로 해석하면 안 됩니다. <17∼20장>의 ‘바빌론의 멸망, 짐승ㆍ거짓 선지자 심판, 용(사탄)의 멸망’에 관한 기록이 <16:13∼21>에는 ‘용의 멸망, 짐승ㆍ거짓 선지자 심판, 바빌론의 멸망’ 순으로 나옵니다. 요한은 앞에서 쓴 파멸의 순서를 바꿈으로써 <7∼8절>에 나온 사탄의 멸망을 더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멸망하는 순서는 논리적인 흐름이고 시간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이 책에서 사탄ㆍ짐승ㆍ거짓 선지자ㆍ바빌론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어서, <17∼18장>에 나온 것처럼 어느 하나가 심판받으면 다른 것도 함께 심판받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사탄ㆍ짐승ㆍ거짓 선지자를 삼위일체 하나님에 빗댄 악의 삼위일체로 표현했는데, 이를 통해 사탄 진영의 파멸을 반복해서 강조했고, 하나님이 악의 세력을 철저하게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8]
사람들 앞에 “책들(복수)”과 “또 다른 책(단수)”인 생명의 책이 등장하고(12절), 죽은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심판받습니다. 그래서 죽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6:17>에서 “누가 하나님 앞에서 버티어 설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는데, 이에 대한 답이 <13절>에 나옵니다. 육신이 죽은 사람들이지만 바다ㆍ사망ㆍ지옥이 그들을 내어놓기에 그들이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이는 심판의 범주가 전 우주적이란 뜻입니다. 여기서 바다가 죽은 사람들을 내어놓는 것(13절), 심판의 책들과 생명의 책(참조. 시편 40:7; 139:16, 다니엘서 7:10, 말라기서 3:16)은 유대인들의 사고관을 반영한 표현입니다. 이는 <19:18>에 나온 사람의 사체를 새들이 먹는 비극처럼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사건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다에 빠져 죽어 시체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의 운명을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스올이라 불리는 죽은 사람들의 세계로도 가지 못하고, 심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영광에도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9]
보좌 앞에 책들과 다른 책 하나가 더 펼쳐져 있습니다. 다른 책은 생명책이고, 책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의 행위를 적은 것입니다. 죽은 사람들은 이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받습니다(12절). 그런데 “죽은 사람들”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지상 강림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육신의 삶을 끝낸 후 하늘에 있는 영혼들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면 <6절>에 나온 교회는 세상에서 지금 왕 노릇을 하지 않고, 미래에 왕 노릇을 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곳이 돼야 합니다. 또 예수님을 믿는 게 그분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는 권세를 받기 위한 것이라고 오해할 소지가 생깁니다. 따라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게 더 성경적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 있는 죽음의 개념과 <요한계시록>에 나온 죽음의 개념이 서로 달라야 할 이유가 없기에 이렇게 해석하는 게 낫습니다(마태복음 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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