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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스채플교회 이광형 목사, '스스로 속이지말라!'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3-01-31 17:03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스스로 속이지말라
(갈 6:7‭-‬8)

남을 속이는 사람. 
그 죄의 비중을 따지고 단정짓는 일은 어려울 것입니다.

그로인해 받게되는 사람의 상처와 고통은 무엇으로도 헤아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속임수라는 범주에서 살펴 볼 때, 다른 사람을 속이는자는 두 가지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먼저는 남을 속임으로 상대방에게 안겨주는 배신감과 상실감, 자책감 그리고 불신등 으로 인한 고통입니다.

어떤 의도였건 결국 사람을 파멸의 구덩이에 밀어버리고 뒤돌아 걷는것이 속이는 자의 걸음입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죄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스스로를 속이는 죄입니다.

남을 속이려면 그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속일 수 있어야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는 결코 다른 사람을 속일 수가 없기때문입니다.

먼저는 자신의 양심을 속이고, 생각을 속이며 외모에서 비추어지는 표정 하나까지 속입니다.

그런데 이 뿐만이 아닙니다.

더욱 두려운 것은 자신이 가진 믿음과 신앙마저 속이고, 부어주신 정직한 영 마저 속입니다.

더 나아가 성령까지 속이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행5:3)

이처럼 속이는 자의 특징은 다른 사람을 완벽히 속이기 위해서 먼저 스스로를 철저히 속인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속이는것은 이중으로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누군가를 속여 본 일이 있다면 당연히 멈추어 돌이키고 자신을 통해 아픔을 겪게 된 누군가에게 사죄하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동시에 자신이 속인 스스로의 양심과 속이고자 했던 성령님까지 돌아보며 회개하고 다시금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세워주시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드린 바 대로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연습을 자주하여 거기에 익숙해 진다면, 이제는 그 속임의 죄성이 다른 사람을 속이는데까지 발전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죄악은 더 뻗어나가 결국 하나님 마저 속일 수 있다는 말도 안돼는 자신감을 가지려합니다.

이단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들이 처음에 어떤 믿음과 양심이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먼저는 스스로를 속여 오직 예수그리스도로만 말미암는 구원을 자신의 것으로 돌리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스스로를 향해 그러한 권능이 있다고 속인 후 이윽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참 어리석게도 그 속임수에 하나님도 넘어가셨으리라 여기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만흘히 여김 받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오직 육체를 위하여 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단 뿐이 아닙니다.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그들이 회개하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명령을 듣고도 불순종하며 다시스로 가는 배에 오릅니다.

이 때 요나는 자신의 생각과 뜻하고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도망치듯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행 배를 탔는데 이것은 요나가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주어진 사명을 부인한 꼴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명을 가지고 있는지, 그래서 마땅히 해야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알지만 그의 어긋난 생각은 이 모든 것들을 부인하게 만들었고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이 옳은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속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를 속이는데 성공하자 결국 그는 하나님도 속일 수 있다는 듯이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가는 배를 탔습니다.

순간 요나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과오를 범했습니다.

또 그러한 속임은 결국 그 배에 타고있는 모두를 속이게 되었고 그로인하여 다시스로 가던 중 배는 풍랑을 만나 위태롭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업신 여김을 받지 않으십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육체를 위하여 더 많이 심을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거기서 얻어지는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더 좋은것을 얻고자하는 마음에 더 열심히 오늘도 육체를 위하여 심고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히 이것은 속고있고 속이는 것입니다.

또한 이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설령 안다 할지라도 육체를 위해 심는 경쟁에서 뒤쳐질까 염려하며 심습니다.

결국 스스로를 속이며 이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핑계로, 하나님도 이해하실 것이라는 자기만의 위안으로...

서로를 경계하는 동시에 격려하는 거짓 평안을 빌어주며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거짓 평안. 이 말을 주의깊게 생각해보시기바랍니다.

거짓평안의 가장 큰 특징은 서로가 평안을 빌고 사랑과 격려로 위하는 듯 하지만 거기에는 서로를 향한 경계와 의심이 도사리고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의 것과 달라 평안 그 자체로 안심하고 오직 주님만을 신뢰하며 믿음으로 서지만, 거짓 평안은 평안하기위하여 날마다 확인하고 점검하고자합니다.

부어주심에 위로를 얻고 기뻐할 수 있는것이 위로부터 오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인 반면에 거짓평안은 안심과 기쁨이 있어야하기에 날마다 만들어내야하는 마치 평안 제작소와 같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거기서 거두는 것은 썩어진 것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무엇을 심어 오셨습니까?

또 여러분이 심을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도 '무엇을 심어야하는지는 알지만...' 이라는 변명으로 다시 스스로를 속이는 일을하려 하십니까?

성령을 위하여 심는 일은 어렵다는 이야기로 서로가 장단을 맞추며 또다시 자신의 연약함만을 앞세우고 위로함으로 위안을 얻으려하는것은 아닙니까?

정말 성령을 위하여 심고자한다면 믿음을 앞세우고 연약함이든 나약함이든 믿음을 따라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으로 가는 길에 의하여 자신의 나약함이 담대함으로, 약함 가운데서 강함으로 일하시는 주님의 손 길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믿음 앞에 자신의 연약함을 세우고 믿음을 끌고 가고자 한다면 믿음은 날마다 그 연약함에 가려질 뿐입니다.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할 것입니다.

'아직 저의 믿음이 연약해서...'

누가 여러분에게 주어진 믿음이 연약하다고 했습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셨는데, 무엇이 여러분을 죽게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까?

날마다 믿음을 자라게 하시건만 어째서 늘 상 믿음 없음을 주장하며 살고자 하십니까?

도대체 언제쯤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설 수 있다는 말입니까?

믿음이 주님께로부터 오고 주님을 향한 것인 이상 세상에 연약한 믿음이라는 말은 또 다시 자신을 속이고자하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결코 믿음 자체가 약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으로 믿음을 가리고 있기에 믿음이 나약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거기에 동조함으로...
이해해주고 그저 감싸주는 것만이 사랑이라는 오해로...

마치 스스로 속이고 더 나아가 서로를 속이고 있는 모습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 것입니까?

결국 속임으로 얻게되는 것은 또 다시 거짓 평안 뿐입니다.

방법은 하나입니다.

'언젠가 믿음이 자라겠지' 라는 안일함이 아니라 여러분의 믿음을 가리고 있는 연약함을 당장 치워버려야합니다.

연약함을 외면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연약함을 뒤로 치우고 믿음을 앞세우라는 이야기입니다.

연약함이 믿음을 감싸고 있는것이 아니라 믿음이 연약함을 품도록해야합니다.

사도바울은 원래부터가 담대하기만하고 강한 사람이었겠습니까?

그에게는 약점이 하나도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겠습니까?

그도 하나님 앞에서 늘 자신의 약함을 두고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고후12:7~8)

그리고 그러한 바울에게 하나님은 응답하십니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바울은 약함을 앞세우며 믿음의 연약함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오히려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그리스도의 능력이 있음을 신뢰하기때문입니다.

믿음을 자신의 연약함 앞에 두고 믿음을 따라 살아가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만일 바울이 자신의 이러한 고민을 두고 소위 사랑의 공동체라 불리는 어느 곳에서 하소연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제가 가진 육체의 가시때문에 무엇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바울 형제님. 그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그정도만해도 대단하신거에요'

'힘든 상황이기에 하나님도 다 이해하실겁니다. 우리 열심히 모여서 형제님의 바램이 다 이루어지기를 위해 기도합시다. 다 해결되고 난 후 무엇을 하셔도 됩니다'

'평안하세요'

아마 고린도후서 12장9절은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일 수 있는 바울이었지만, 바울은 육체를 위하여 심음이 아닌 오직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을 택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바울의 간구와 기도에 결코 업신여김을 여김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분명 오늘도 여러분에게는 심어야 할 것이 주어져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심을 것에 대한 선택은 자유입니다.

다만 주님이 거두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무엇을 심든 늘 심으며 살아가야합니다.

무엇을 심고자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심으시겠습니까?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7~8)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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