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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3-03-05 13:16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예수님! 어서 오십시오(요한계시록 22:6∼21)

[1]
<6∼21절>은 요한이 받은 계시에 관한 기록을 끝맺는 에필로그(epilogue)입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그가 아무렇게나 쓴 것처럼 보입니다. <요한계시록>의 프롤로그(prologue, 1:1∼8)와 비교하면 이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듭니다. 앞뒤에 나온 표현들이 긴밀하게 연결돼 있지 않고, 말하는 주체가 누구인지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건 그가 붓 가는 대로 에필로그를 써서 그런 게 아닙니다. 책을 매듭지으며 그가 본 환상으로 받은 은혜와 감동으로 격해진 마음이 앞서다 보니, 차분하게 논리를 전개하지 못한 채 끝부분을 기록했습니다. 그도 인간이기에 그동안 그가 봤던 환상을 정리하는 글을 매듭지으면서 격한 감동에 마음이 들떴을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로마서>에도 나옵니다. <로마서>에 “아멘”이 다섯 번 나오는데(1:25; 9:5; 11:36; 15:33; 16:27). 이 중에 끝부분인 <로마서 16:27>을 제외한 네 곳은 더디오에게 <로마서>의 대필을 맡겼던(로마서 16:22) 바울이 복음을 증언하며 감동해 추임새처럼 넣은 표현입니다. 

[2]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라고 했습니다(7절). 앞부분에 길게 환상을 기록했던 요한은 <요한계시록> 끝부분에서 성도에게 하루하루를 건전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인내ㆍ믿음으로 살아가면서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바울도 말씀했지만(데살로니가후서 3:6∼15), 환상에 빠져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세상의 모든 삶을 포기하는 건 성경에서 금지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보다 더 위험한 게 예수님의 강림이 아예 없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입니다. 예수님의 강림은 보혜사 성령님과 그분이 직접 한 약속입니다(요한복음 14:3). 그래서 처음부터 성령님의 은혜 속에 모든 세대를 통해 교회 속에서 예수님의 강림 준비가 이뤄져 오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에게 그분이 한 말씀을 생각나게 해서(요한복음 14:26), 성경 말씀을 지키며 그분의 강림을 준비하도록 성도와 교회를 인도합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성령님과 신부가 예수님의 강림을 요청했습니다(17절). 교회에 내주한 성령님이 신부에게 예수님의 강림을 요청하도록 인도했고, 이분의 인도에 맞춰 목마른 사람과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이 초대교회에서부터 예수님의 강림을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3]
<새번역성경>은 <7절>에서 엘코마이(ἔρχομαι)란 동사를 “오겠다”, <20절>에서는 “가겠다”로 번역했습니다. 엘코마이가 ‘가다, 오다’란 뜻이 있기에 같은 단어를 문맥에 따라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개역개정성경>은 둘 다 이 땅을 강조해 “오겠다”로, <공동번역성경, 쉬운성경>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해서 “가겠다”로, 영어 번역 성경인 는 “coming”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해 아래 세상의 모든 주도권이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있기에 이 단어는 “가겠다”로 번역하는 게 더 낫습니다. 이 땅은 구원의 과정 중에 인간이 거쳐 가는 세계입니다. 이 땅이 완성된 곳이 아니기에 그 나라가 주체가 돼 그곳에서 이 땅으로 예수님이 ‘가는’ 것이지 ‘오는’ 게 아닙니다. 이 땅의 궁극적 완성이 그 나라의 강림으로 완성되기에, 예수님이 그 나라에서 이 땅으로 ‘가겠다’라고 했습니다. 이 땅은 영원하지 않지만 만들어진 목적이 있기에, 그 나라에 있는 예수님이 이 땅으로 갑니다.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이 땅으로 내려오기에(21:10), 새 예루살렘을 우리는 지금 기다립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가겠다고 하자 요한이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이라고 화답했습니다(20절).

[4]
천사는 요한에게 더는 말씀을 봉인하지 말라고 했는데(10절),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이와 반대로 때가 올 때까지 받은 계시를 당대의 사람들에게 봉인하라고 했습니다(다니엘서 8:26; 12:9). 다니엘이 받은 계시는 여러 날 후에 이뤄질 일이기에 봉인했지만, <요한계시록>의 말씀은 성취의 때가 다가왔기에 굳이 봉인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책은 이 책을 쓴 때로부터 먼 후세대인 오늘날만을 위한 게 아니라, 먼저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이후 신약시대 동안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특정 시대에 이 말씀이 풀어지도록 따로 봉인해 둘 필요가 없습니다. 

[5]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님이 강림해야 우리가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는데(사도행전 1:8), 오순절에 성령님이 강림했고(사도행전 2:1∼4), 이후 이분이 교회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특정 시기에 <요한계시록>이 풀어질 것이고, 그때 자신이 특별한 은혜를 받아 이 책을 풀어냈다고 주장하는 건 이 책의 메시지와 다릅니다. 또 <11절>이 <다니엘서 12:9∼10>을 인용한 것이기에 이런 면은 더욱 두드러집니다. 구약성경을 성령님의 은혜로 기록했기에 하나님이 말씀하신 걸 이루기 위해 이분의 강림은 철저히 성경에 근거를 둔 채 이뤄집니다(요한복음 14:26, 로마서 8:27).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성경(디모데후서 3:16∼17)에 근거를 두지 않았는데도, 성령님의 은혜로 받은 계시라고 하면서, 자기의 주장을 성경보다 앞세우는 사람은 가짜입니다. 성경은 한 분 성령님이(에베소서 4:4) 기록하게 한 말씀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듯 구ㆍ신약성경의 해석이 서로 대립하면 안 된다는 원칙은 “행위대로 갚아준다”란 말씀에도 나타납니다(12절). 이는 <잠언 24:12>을 인용한 것인데, 이 말씀을 예수님뿐만 아니라, 요한(20:12∼13), 바울(고린도후서 11:15), 베드로(베드로전서 1:17)가 인용했습니다.

[6]
<요한계시록>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교회들을 위해 준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교회들에 이 모든 계시를 주셨습니다(16절). 교회는 이 땅에서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이끌어 가기 위해 예수님이 세운 공동체입니다. 그렇기에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갈 때까지, 노아가 만들었던 방주와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일을 수행하는 모임이기에, 내가 출석하는 예배당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내게 손해를 끼친 사람이 천연덕스럽게 예배당에서 내 옆에 앉아 나와 같이 찬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역으로 나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해 답답하지만, 나로 인해 답답해하는 사람도 교회에 있습니다. 교회는 죄인이 모여 의인이 되려고 하는 곳이기에 성화하면서 서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님이 주는 성숙의 아픔이 싫어서, 교회라는 성도의 모임이 싫어서 인터넷으로 설교를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 건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껴안고 가면서 성도끼리 고쳐서 바로 세워야 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만약 내가 바로 세우고 감당해야 할 몫을 버린 채 도망가면 성령님의 은혜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게 교회를 이끄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야 합니다. 성령님이 자신에게 인도해 준 교회를 통해 신앙이 성숙해지는 성화의 길을 가야 합니다.

[7]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며 자손인데(16절), 이로 인해 역설이 발생합니다. 어떻게 뿌리면서 자손, 할아버지면서 손자가 됩니까? 그런데 이게 복음서가 증언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해 아래 세상에 왔기에 다윗의 후손입니다(마태복음 1:1, 요한복음 1:14). 그러면서 예수님은 다윗의 뿌리입니다(5:5).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말한 뿌리로서의 예수님은 다윗의 하나님이요, 창조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분이 있었다고 했습니다(요한복음 8:56∼59). 유대인은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자 그분을 오해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나온 대로 다윗의 뿌리면서 자손이란 역설의 관점으로 보면 <요한복음 8:56∼59>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8]
요한의 경고는 <신명기 4:2, 잠언 30:5∼6>에 근거한 것인데(18절), 이는 유대 묵시문학의 특징 중 하나입니다. 유대 묵시문학에는 이런 엄숙한 경고가 있습니다. <신명기, 요한계시록>은 우상숭배와 하나님의 말씀에 인간이 빼거나 더하는 걸 경고했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지킨 사람은 새 생명의 보상이 주어지지만, 신실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신명기 4:1; 12:28∼29, vs 14절; 17∼19절). 그런데 초기 기독교를 공격한 영지주의를 보면 이런 경고가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신학자로 자신이 바울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던 마르키온(Marcion)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가졌다고 표현한 말씀을 모두 지우고 <누가복음>을 읽었습니다. 아티안이 쓴《사복음서 대조》도 영지주의 입장에서 복음서의 내용을 선별해서 따로 구성한 책입니다. 그리고 오늘날은 사이비ㆍ이단들이 이와 비슷한 짓거리를 합니다.

[9]
<21절>은 <22:6∼10>의 결론이자 <요한계시록>과 성경 전체의 결론입니다. <창세기 1:1>과 이 말씀을 연결하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으니 그걸 알고, 예수님의 은혜로 살아라’란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를 뺀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 바울이 쓴 편지의 축원과 달리 평화가 빠졌습니다. 바울은 그가 쓴 편지에서 은혜와 평화를 기원했는데 요한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20절>에 나온 기도처럼 예수님의 강림으로 이뤄진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는 이미 평화가 이뤄진 곳이기에 그는 은혜만 말했습니다. 그 나라에는 평화가 기본으로 정착돼 있기에 은혜만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한 예수님의 은혜는 내가 먼저 그분처럼 돼 작은 예수가 되는 게 아니라 그분이 먼저 내게 다가온 것이고, 이를 위해 성령님이 먼저 내 안에 내주한 것입니다(고린도전서 3:16). 성경에 의하면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성도는 가지기에 크리스천이 먼저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성도 안으로 들어와서 이 은혜가 온전해집니다(요한복음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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