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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돗교회 정이신 목사, '행복하여라, 그 사람!'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3-03-12 10:59

아나돗과 함께 읽는 성경 정이신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 행복하여라, 그 사람(시편 1편)

[01]
<시편>에 나온 시인들의 기도는 언제나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시인들의 시각으로 봤을 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삶이라면 아무리 현재가 고달프고 힘들어도 궁극적으로 승리가 예정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들은 그걸 보고, 파고가 높은 바다 위를 항해하는 배 위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배가 도착할 항구를 생각하며, 탄식과 절규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실하심을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시편> 편집자는 이걸 반영해 이 책에 수록한 다섯 권의 책 끝부분마다 찬양과 송영을 배치했습니다. 그래서 제1권의 끝부분인 <41:13>, 제2권의 끝부분인 <72:18∼19>, 제3권의 끝부분인 <89:52>에는 ‘아멘, 아멘’이 나오고, 제4권의 끝부분인 <106:48>에는 ‘아멘, 할렐루야’, 제5권의 끝부분인 <150장>에는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02]
<시편>은 하늘나라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담은 예언서와 달리 지상에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인간의 목소리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예언서에도 선지자를 포함한 인간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지만, 이걸 담은 비중을 예언서와 비교하면 <시편>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시편>을 보면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겪은 고통과 불행, 간구와 감사, 찬송과 찬양을 하늘나라의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후 이걸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련(精鍊)해서 글로 기록했고, 이를 구약성경에 수록해서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개인과 공동체가 토설(吐說)했던 기록인 <시편>을 성령님이 정경으로 인준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예가 <요한계시록>에도 나옵니다. <요한계시록>에는 땅에 사는 성도의 기도가 하늘나라에 전달된 후, 이에 대한 반향(反響)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진행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는 성도의 기도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는 구원 섭리가 된 것입니다. 

[03]
성경에 수록된 책은 대개 첫 문장이 그 책의 주제를 드러냅니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은 <창세기 1:1>에 나온 히브리어 태초(히브리어: 레쉬트)를 헬라어로 번역한 ‘시작(아르케)’이 책의 제목입니다. 그러나 이런 어감을 우리말로 번역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은 이러하다”로 <마가복음 1:1>을 번역했습니다. 그렇지만 헬라어의 어감으로 보면 책의 제목이 ‘태초’나 ‘시작’입니다. 이 같은 고대의 책에 관한 이해로 보면 <1편>은 ‘복이 있구나, 그 사람’, ‘행복하여라, 그 사람(아쉐레이 하이쉬)’이 시의 제목입니다. 그리고 제목이 가진 의미를 고려하면 <1편>은 복의 실체가 율법(토라: 하나님의 말씀)에 있다는 선언입니다.

[04]
히브리어로 보면 시의 시작을 아쉐레이로 한 게 특이한데, 우리말에서도 복ㆍ축복과 행복은 다릅니다. 복은 무언가를 받거나 소유한다는 뜻이고 축복은 이걸 빌어준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행복은 사람이 다다를 수 있는 최상의 마음 상태를 가리킵니다. 우리말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서도 복ㆍ축복에 해당하는 바라크가 따로 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라크가 아니라 아쉐레이를 첫 문장에 감탄사로 썼습니다. 이런 면에서 <시편>이 말한 복이 뭔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시편> 외에도 구약성경에서는 아쉐레이를 지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장을 기술할 때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지혜문학으로 대변되는 <잠언>에서 지혜는 성령님의 선물이면서, 혼란스럽고 방황하기 쉬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올바른 삶의 방향과 길을 찾는 인간의 능력입니다. 따라서 <1편>에서 말한 행복은 아무것도 없는 진공에서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행복은 어둡고 캄캄한 세상에서 올바른 길인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가는 신앙의 노정 속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인이 시의 시작을 이 단어로 했고, <시편>의 편집자가 이 책의 표제를 <1편>으로 한 것에는 이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05]
<레위기ㆍ신명기>가 아닌 <1편>이 율법을 찬양하는 모습이 낯설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마가복음 1:1>의 선언이 갖는 의미와 비슷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서는 복음서로 들어갈 수 없듯이, 하나님이 주신 교훈을 모르고서는 <시편>이 말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시편>에 나타난 하나님을 만나기 원하는 사람은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이게 표방하는 가치체계에 헌신해야 합니다. 물론 <시편>이 전체적으로 율법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1편>에서 율법이 가장 복된 소식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시편>이 그린 세계가 모세오경과 같은 궤적을 그린다고 선언합니다. <시편> 전체의 구성에서 <1편>은 사람들을 가르치는 데 목적을 둔 채 이 책의 특징을 말하고, <2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란 예언적 상황을 토대로 이 책을 읽으라고 합니다. 

[06]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예배와 신앙은 성도를 연합하도록 유도하면서(에베소서 4:3), 의인과 악인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한 사람은 특별한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1∼2절). 이때 시인이 사용한 단어가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말씀한 여덟 가지 복(마카리오스)과 같은 의미기에(마태복음 5:2), 그분의 산상설교에 나오는 여덟 가지 복과 <1절>은 같은 궤적을 그립니다. 우리는 이걸 보면서 예수님의 말씀과 연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진정한 행복은 ‘No’라고 말해야 할 때 ‘No’라고 의사 표현을 하는 것임을 배워야 합니다. ‘No’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인데도 여러 가지 이권에 휘말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질질 끌려가는 건, 예수님의 말씀에 비춰보면 행복을 원하는 사람이 해야 할 행동이 아닙니다. 

[07]
<1:1ㆍ5ㆍ6>에서 “죄인ㆍ악인(라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죄가 있다고 판정한 사람입니다. <5:4∼6>에는 죄인이 저지르는 여러 가지 악이 나오는데, 성전의 제사장은 저런 사람을 예배에 들이지 않았습니다(15편). 저런 사람은 도덕성이 해이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사람으로 자신의 꾀ㆍ모략을 성경의 가르침보다 더 신봉합니다. 또 “오만한 자”는 하나님에 대해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아담ㆍ하와의 타락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이 저지른 죄의 근본은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 앉은 후, 선악을 주님 대신 판단한 교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한 사람은 저런 자가 주는 걸 거절해야 합니다. <1편>에 따르면 크리스천은 먼저 부정어법으로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긍정 어법으로 토라를 즐거워하며 묵상해야 합니다. 여기서 율법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기본적인 가르침에 토대를 둔 삶의 방식입니다. 1권에 수록된 다른 시를 보면 하나님은 이 가르침을 주님의 백성 마음에 심으셨는데(37:31; 40:8), <시편> 전체에서는 <119편>에서 대대적으로 이런 가르침을 노래했습니다. 또 이 말씀을 <잠언 1:7>과 비교해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게 지혜(지식)의 근본이기에, 사람이 성령님이 준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악을 피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08]
시인은 “밤낮”이란 양극 대칭적 문학 기법을 사용했는데, 밤낮으로 율법을 읊조린다고 했으니(2절) 이는 ‘온종일, 전 생애’에 걸쳐 변함없이 하나님의 가르침을 사모하고 갈망하라는 권면입니다. 밝은 날이든지 어두운 날이든지, 건강할 때든지 병들었을 때든지, 해 아래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들떠있을 때든지 실패했다고 주저앉아있을 때든지 늘 하나님의 가르침을 읊조리며 그 교훈대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1ㆍ5∼6절>에 나온 표현을 토대로 두 가지 길 중 의인의 길을 선택하라는 권면으로 <1편>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쉐레이는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길 중 행복해지는 길을 선택하라는 권면이 아닙니다. 이는 인간의 삶에 있는 근원적인 즐거움과 행복은 하나님이 주신 교훈이란 메시지입니다. <시편> 외에 구약성경의 다른 책에 나온 아쉐레이의 용례를 보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생 최대의 기쁨으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09]
<3절>은 <1∼2절>의 교훈을 따른 사람에게 나타나는 최종 형국으로, 이 말씀에 나온 이미지를 예레미야도 사용했습니다(예레미야 17:7∼8). 여기서 시냇가는 저절로 생겨나서 흐르는 강이나 시냇물이 아니라 농사를 지으려고 일부러 만든 관개용 수로입니다. 중동에는 기후로 인해 우기(雨期) 때만 물이 흐르고, 건기가 되면 말라버리는 와디(wadi)가 많았습니다. <3절>에서 말한 시냇가는 이런 와디와 달리 인간이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이 끊임없이 흐르도록 관리했습니다. 하나님이 관리하셔서 이 시냇가에도 늘 물이 흐릅니다. 그러므로 이 주변에 심긴 나무가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시들지 않고 나무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셨으니,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 열매는 특정한 행위에 대한 보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과 율법에 따라 행동하는 삶의 방식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게 있습니다. 율법에는 예절ㆍ관습ㆍ체면과 인간의 삶에 반드시 적용해야 할 내면의 원리가 모두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야로 읊조리는 사람에게는(2절) 자연스럽게 그의 삶에 이 두 종류의 열매가 풍부하게 나타납니다.

[10]
<1∼3절>과 하나님이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던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지침인 <여호수아기 1:7∼8>은 여러모로 닮았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복은 복음서에 나온 여덟 가지 복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것처럼 영적 열매만을 뜻하지 않고, <시편>에서 말한 복도 삶에 그런 현상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37:25; 128:3; 144:12∼14). <1편>은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면서 이 말씀대로 살면 이런 복이 다가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대개 하나님의 복을 알아보는 눈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이 나타나도 그걸 잘 모르고 놓칩니다. 이미 복이 나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았다고 오해하면서 한탄하다가 사탄에게 빼앗기기도 합니다. <1편>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복이 어떻게 나타나는지도 배워야 하지만, 무엇이 성령님이 주시려고 하는 복인지 알아보는 눈도 관리해야 합니다. 이 눈이 없으면 가나안을 정탐하고 온 후 악평을 늘어놨던 사람들처럼(민수기 13∼14장) 하나님이 주신 복을 알아보지 못하고 엉뚱한 걸 추구합니다.

jso848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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