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29일 금요일
뉴스홈 종교
킹스채플교회 이광형 목사, '당신의 예배는 무사합니까?'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3-04-21 06:53

도곡동 드누보 문화선교센타 이광형 목사./아시아뉴스통신=오준섭 기자

당신의 예배는 무사합니까?
(창4:3~7)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사람 그 예배자..." 라는 찬양 가사가 있습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라는 찬양인데 이 찬양의 가사를 조금 더 살펴보면, "주를 위한 이 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그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 라는 고백으로 올려드리는 찬양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이 찬양을 자신의 고백으로 드리며 노래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주님께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사람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면에 주님이 받으시는 예배, 주님이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오죽하면 주님이 찾으실 정도입니까?

주님 앞에서 진정한 예배자가 얼마나 없으면 주님이 직접 예배자를 찾고 구별하실 정도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작은 교회이건 큰 교회이건 저마다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지만 오늘 지구상에서 드리는 모든 예배는 잘 준비하고 드리기에 무조건 주님은 다 받으시고 영광중에 거하셔야만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행여 오늘 내가 드리는 예배를 주님이 받지 않으시는것은 아닌가?

여러분은 그런 생각해보신적이 없습니까?

확실한 것은 주님은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무조건 다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에대해 두 세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주님도 거기에 계신다는 말씀이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맞습니다.

이것은 약속이기에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분명히 주님이 계심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거기까지라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이 함께 계심만으로도 평안이 있고 위로가 있고 담대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고백이 단순히 주님이 함께 하심만으로 모든것이 다 해결되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특히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 '주님이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와 같은 말을 너무 쉽게 언급합니다.

물론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면 당연히 주님이 이루신 일이고, 다가올 시간을 내다 보더라도 마땅히 주님이 이루실 일이기에 믿음으로 고백한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이 고백을 너무 쉽게 흘려보냄으로 주 안에서 내가 해야할 일에 대해서까지 조금은 나태해지거나 무책임해진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주님이 하실 일, 주님이 이루실 일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있어야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님이 이루실 일에 대하여 우리는 주 안에서 맡겨진 사명 주어진 역할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공중의 새를 주님이 먹이시지만, 새는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야 합니다.

둥지에 들어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먹이를 공급받는것이 아닙니다.

길가의 나무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받고 계절을 지내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지만, 그 뿌리가 열심히 물을 빨아드려야하고 가지와 잎은 꽂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를 주님이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선포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이 하신 일, 주님이 하실 일을 온전히 믿고 확실히 선포하더라도 그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오늘 나에게 주어진 일에대해 담대하게 걸어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홍해 앞에서 주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리더라도 당장 완벽하게 갈라지지 않은 바다를 향해 발을 담그고 들어가야 했습니다.

만일 그들이 그저 주님이 함께하심으로만 만족하다 여기고 주님이 하실 일만 바라본다 생각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주님이 임재하신 그 자리에만 눌러 앉아 있었다면 아마 그들은 이후에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 언급할 이야기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잠잠히 있어 주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라는 말은 아무것도 하지말고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주님이 하시는 일만 바라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말고, 겁내지 말고, 방정맞게 떠들지 말고, 믿음없는 이야기, 의심의 생각을 다 버리고, 다 죽게되었다고 한탄하거나 주님이 계시지 않으니 포기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지 말고, 내 할 일을 믿음으로 해 내면서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일을 바라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야 바다를 건너가 주님의 영광을 찬양하며 주님이 하신 일을 노래하고 기뻐하며 감사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주님이 하셨다는 고백은 단순히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야 주님이 일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과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리고 담대함으로 발을 내 딛음으로 나를 통해 주님이 일하셨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이 해야하는 그 일에 고난과 수고가 가득할지라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간다면 거기에는 엄청난 고난이 도사리고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기도하고 중보하던 사람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 것을 권유했는데 이는 그들이 어쩌면 주님이 하실 일을 바라보기를 바래서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함과 동시에 주님이 자신을 통해 일 하심을 알기에 믿음의 동지들의 기도로인한 권유를 뒤로한 채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바울은 도리어 그들을 위로하며 주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이야기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20:22~24)

결국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체포 당하고 고난 받으며 로마로 가게 되는데, 이 때 그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 볼 뿐 아니라 그 일하심의 현장에 직접 참여하고 이 후에 주님이 하신 일을 되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이처럼 주님이 하신 일에 대해서 올바르게 회상하며 감사드리기를 원한다면 주님이 이루실 일을 믿고 기대하며 동시에 주 안에서 지금 나에게 맡겨진 일, 그 사명에 소흘함이 없어야 합니다.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뜻이 아니라면 멈춰서고, 더 나아가 때로는 눈물지으며 돌고 돌아갈 지라도...

그래야 주님이 잠시 멈춰서게 하신 곳에서 지금까지의 여정을 뒤돌아보며 주님이 하신 일을 찬양하고 계속해서 주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삶, 그 인생의 여정이 끝나는 그 날 까지... 

바로 이것이 우리의 삶 가운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이라 하더라도 단지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을 뿐이라면, 그래서 그저 그것으로만 족한 줄 알고 살아가는 신앙이라면, 더더욱 가인의 예배를 기억하며 경각심을 가져야합니다.

가인도 자신이 드리는 제사, 그 예배를 주님의 이름으로 드린다 하고 그 곳에 당연히 하나님이 계시고 받으시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주님은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를 구별하시고 원치 않는 제사를 거부하십니다.

왜 주님께 예배 거부권이 있으시리라고 생각해보시지 않았습니까?

이미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거부하시고 합당치 않음에 그가 드린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가인의 이야기로 넘겨버리지 말고 행여 오늘 내가 가인처럼 될 수 있음을 염두하고 주의해야합니다.

여러분, 가인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주님을 떠나 있는것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자꾸만 드러나려하고 있을 뿐 아니라 특히 우리가 드리는 예배 속에 깊이 파고들고자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실로 커다란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그의 본성이 살기 가득하고 포악한 사람이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모든 일이 그의 평소 성격이나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예배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인 역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히려 가인이 어느면에서는 동생 아벨보다 더 고급스럽고 세련된 예배를 드렸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가인이 이렇게 자신이 준비한 예배를 드렸다면 왜 그가 자신의 예배에 소흘 했겠습니까?

가인은 자신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당연히 받으시리라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당연하다 여겼던 생각이 스스로의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 때 가인도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예배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입니다.

가인의 예배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교만이나 불순종, 의롭지 못함에 대하여, 정성에 대한 이야기, 죄 성 등...  우리는 많은 이유와 원인을 이야기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쨌든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죄송합니다만, 한가지 우리가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모인 여러분들은 모두가 가인이라고 생각해봅시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거부하시는 거에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먼저 생각하시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셨을까?'

자신의 죄성, 회개치 않은 죄악 등 여러 생각을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모두가 예배 드림에 실패했는데 저 뒤에 앉아계신 집사님 한 분의 예배는 받으셨습니다.

그럼 저 분은 가인이 아닌 아벨의 예배입니다.

이제 다시 여러분에게 드는 생각, 감정은 무엇입니까?

'부럽다, 존경스럽다, 대단하시다, 역시... 그런데 왜?'

모두가 예배드림에 실패하셨는데 한 분만 예배를 제대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이에 그 사람의 예배에 대해서 때로는 배우고 닮아가려는 마음과 함께 한 쪽 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는데...' 라는 의구심과 시기심이 살짝 삐져 나오려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의 공정성에 대해 의심하려는 모의가 시작됩니다.

잠시 후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괘씸하고 억울합니다.

아벨이 미워지기 시작하고 아벨은 뭔가 하나님으로부터 사적인 특혜를 받은 사람처럼 인식되고 하나님은 나만 미워하시고 나를 차별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저 사람의 기도만 들어주시고 내 기도는 안 들어주신다는 상상을 합니다.

하나님께는 삐치고 상한 마음이 가득하고 아벨은 보면 볼 수록 잘난척하는 듯 보이고...

행여 예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아벨은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데 여러분 잘 보십시오.

이 모든 과정이 예배에서부터 시작되고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놓친 것이 있어요.

하나님은 예배를 받지 않으셨지만, 가서 다시 준비하고 제대로 잘 드리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손 수 예배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더 잘 준비하고 더욱 멋지고 훌륭하게 제작한 예배를 드릴지라도 계속해서 가인으로 드리는 예배라면 하나님은 또 다시 받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입니까?

이제 가인을 멀리 떠나 보내버려야합니다.

그동안 이 사실에 대해서 너무 무심하게 살아온 인생이자 예배자의 삶이었다면 내 안에 자리잡고 또 다시 기지개를 펴려하는 가인의 모습이 있음을 먼저 알아야합니다.

그 가인은 나와 관련없는 창세기의 이야기를 통한 아주 오래된 역사적 인물일 뿐이라 속삭이는 사탄의 속삭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탄은 예배를 드리라 합니다.

주일이니 당연히 교회에가고 정해진 시간에 가장 좋은 장소 좋은 모임 훌륭한 예배를 지향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예배 가운데 가인의 예배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속삭입니다.

예배를 드렸으니 당연히 은혜를 언급하라고 하고 거기에 만족하면 된다고 합니다.

사탄의 이야기는 오직 드리는 자의 만족을 언급할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예배는 받으시는 분을 먼저 기억해야합니다.

우선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가인의 모습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고, 찾아내야 쫓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예배가 더 이상 가인의 그림자가 드리운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가 아니라 나와 나의 예배를 합당하다 하시며 받으시는 아벨의 산 제사가 되도록 해야합니다.

영과 진정의 예배는 이렇게 시작되고 구분되어지는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 뜨겁게 기도하고 열심히 준비하고 빈틈없는 예배, 모두가 만족할 은혜를 위한 예배만을 구하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늘도 내 안에서 꿈틀대는 가인의 모습을 찾아내고 쫓아내고 작은 자이더라도 아벨로서 하나님이 합당하다 하시며 받으시겠다 허락하시는 예배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그동안 예배를 드림에 있어서 가장 우선 순위는 내 만족에 두고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나.

나에게 은혜가 있어야하고, 설교와 찬양이 좋아야하고, 나에게 유익이 있어야하며, 편의가 제공되어야하고, 갖추어지고, 프로다워야하며, 웅장함을 거룩함과 연결지어놓고, 이 모든 것들이 내 마음의 흡족함을 충족시키는 예배, 그러한 예배가 있는 곳을 찾는 예배자 였습니다.

그러한 중에 가인 중 한 사람으로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은 외면한채...

가인으로 아벨인 듯 예배를 드려왔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가인이 생각하는 영과 가인의 마음으로서의 진리 뿐인줄도 모르면서 나의 예배는 문제 없다 여기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영과 진리를 다해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인의 모습을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헛 될 뿐입니다.

돌아오는 것은 은혜 중에 공허함입니다.

은혜를 받았다 하면서도 그 은혜 속에 거하며 살아가지 못하고 그것은 나를 위한 은혜가 아니라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시 하나님은 불공평하시고 아벨은 미워집니다.

예배를 드리면서도 은혜 중에 회복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고서도 상처와 불평은 더 커지는 듯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이 예배의 자리에 어떤 모습으로 계십니까?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누군가를, 또 스스로를 정죄하거나 한탄하기 위해 나누는 말씀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늘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잘 배우고 제대로 준비해서 갖추고 다시 오라는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 그 예배자를 하나님은 손 수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찾으시는 그 예배자가 바로 여러분이 되기를 여러분 자신보다 더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여러분을 가인으로 바라보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아닌 아벨과 같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그리고 그 예배자 여러분이기를 바라시며 오늘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된 예배자로서의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오늘 여기에 모인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4:3~7)

jso8485@naver.com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가장 많이 본 뉴스

실시간 급상승 정보

포토뉴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