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권형원(權亨源) 의병장 초상화.(사진제공=독립기념관) |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소장 장석흥) 박민영 선임연구위원은 28일 오후 2시부터 독립기념관 밝은누리관에서 제324회 월례연구발표회를 갖는다.
이번 연구 발표에서는 논문 ?고성(高城) 의병장 권형원의 의병투쟁과 단두 ‘부전(釜煎)’ 수난?을 다루게 되고, 이 논문의 토론은 1995년 북해도대학 동학군 유골 방치사건을 폭로한 원광대 박맹수 교수가 맡는다.
토론은 ▲권형원(權亨源) 의병장의 단두 부전 수난 '강원도 고성군 서면 송탄리(松灘里, 휴전선 북방, 현 고성군 순학리의 금강산 진입로 부근) 출신의 권형원(1854-1907) 의병장' ▲두골의 일본 강제반출 '처참하게 수난을 당한 권형원의 두골은 그 뒤 30여 년이 지나 일본에서 발견됐다' ▲생생한 구전, 증언 자료 "놈들은 두부(頭部)를 자절(刺切)해 100도 이상의 비발(沸潑)에 팽증(烹蒸)해서 자국으로 보내고 만 것이다”?▲박은식이 폭로한 일본군 만행 기록의 주인공 '민족주의 역사학자 백암(白巖) 박은식(朴殷植)이 1915년 중국 상해에서 간행'?▲에필로그 ‘부친의 기막힌 수난을 지켜본 큰아들 권병섭(權秉燮)은 복수의 한을 품고 항일전 참전’?▲역사적 의미 ‘일제 침략으로 야기된 민족수난의 고단한 형세와 참담한 실상’ 등의 단락별 주제로 진행된다.
독립기념관 관계자는 “의병전쟁에 참여해 항일전을 벌였던 권형원의 순국 수난의 참상은 한국의 국권을 강탈하던 일본 군국주의의 야수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냈다”며 “일제 침략으로 야기된 민족수난의 고단한 형세와 참담한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한국 근대사의 비극의 한 단상이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 |
| 구전 증언 자료 순국의사행적추천서(1962)의 단두 부전(釜煎) 기록.(사진제공=독립기념관) |
권형원(權亨源) 의병장은?1896년 민용호가 이끌던 강릉의병 예하의 고성 유진장(留陣將)으로 활약하던 의병장이며, 당시 동해 연안 어장을 침탈하던 다수의 일본인 어부들을 잡아 처단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상인들의 상권 침탈행위도 단죄하는 등 이 지방의 항일투쟁을 선도한 인물로 기록됐다.
또?1907년 광무황제 강제퇴위와 대한제국군 강제해산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확대 고조되자, 의병전선에 다시 나선 권형원은 고성, 간성, 양양, 강릉 일대를 전전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53세의 나이로 수개월 동안 10여 회의 대소 전투를 벌였으며,?권형원이 치룬 최후의 항일전은 1907년 10월 20일 고성전투였다.
일본군의 전투상보에 의하면, 이 날 새벽 권형원이 인솔한 의병 350명이 고성읍을 습격, 5시간 동안 머물며 그곳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분견대(51연대 9중대 소속의 1개 소대 규모)를 유린한 뒤 철수했고, 이에 분풀이에 나선 일본군은 의병을 후원하던 인근 여러 마을을 돌며 지도자 12명을 동시에 집단 학살했다. 이때 송탄 자택에 숨어 있던 권형원도 일본군에게 잡혀 고성읍을 관류하는 남강(南江)의 송림(松林)으로 끌려가 총살 순국하는 수난을 당했다.
권형원의 수난은 순국 후에 더 처참했다. 전날 고성에서 유린당한 여파로 분이 풀리지 않은 일본군은 시신에서 목을 잘랐고, 잘라낸 두부를 일본군 수비대 본부가 있던 장전항(고성 북쪽)으로 가져가 가마솥에 넣고 삶는 끔찍한 만행을 자행했던 것이다.
총살, 단두, 부전으로 이어지는 세 차례 만행이 연속적으로 가해진 이 참상은 한국을 침략하던 일본군이 보여준 반인륜, 반문명의 야수적 속성을 그대로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관계자는 "한말 의병탄압에 동원된 일본군이 1907년 의병장을 총살한 뒤 목을 자르고 그 두부(頭部)를 가마솥에 넣고 삶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한 사실의 전모가 뒤늦게나마 밝혀지게 됐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