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6월 05일 금요일
뉴스홈 종교
시카고 언약장로교회 유승원 목사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서울=아시아뉴스통신] 오준섭기자 송고시간 2020-05-23 00:00

시카고 언약장로교회 담임 유승원 목사.(사진제공=언약장로교회)


<애 3:40-66>

1. 성경에는 ‘울음’이 제목인 책이 있습니다.
오늘 주어진 말씀인 애가(哀歌), ‘슬픔의 노래’입니다. 영어성경에서는 Lamentation이라 했습니다. ‘통곡’이란 뜻입니다. 남자들의 허세를 미덕으로 생각하던 시절, 남자가 눈물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남자는 인생에 딱 세 번 운다고 했었지요. 태어날 때, 그리고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나라가 망했을 때… 애가서는 나라가 망했을 때의 통곡입니다. 전통적으로 예레미야의 통곡 시로 알려져 있습니다.

2.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요시야의 셋째 아들이며 여호야긴의 작은아버지가 되는 시드기야를(대상 3:15) 꼭두각시 봉신왕으로 세워 자신에게 충성하게 했습니다(왕하 24:17). 그러나 시드기야가 즉위 9년째 되는 해에 현실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하고 무리한 반기를 들었고 느부갓네살은 그의 군대를 이끌고 와서 약 2년간 예루살렘을 포위한 채 외부로부터 식량과 물자의 공급을 차단하자, 예루살렘 성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주전 587년 8월, 결국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벽을 뚫고 진입하는데 성공하고 시드기야 왕은 사로잡혀 그 아들들이 그의 목전에서 살육(殺戮)을 당하는 꼴을 마지막으로 보고 두 눈을 뽑힌 채 짐승처럼 바벨론으로 끌려갑니다. 그 동안의 저항에 대한 복수는 잔혹했습니다. 예루살렘의 왕궁과 솔로몬의 성전, 그리고 귀족들의 집까지 모두 불살라 버리고 예루살렘 성벽 사면을 모두 헐어버렸으며, 성내에서 저항하던 사람들은 왕과 함께 2차포로가 되어 바벨론으로 강제 송환됩니다. 이제 유다 땅에 남은 것은 포도원지기와 농부로 사는 천민들뿐이었습니다(왕하 25:12).

3. 완전히 망한 것입니다. 랄프 클라인(Ralph W. Klein)은 네 가지 중요한 신앙 유산의 붕괴를 말합니다(Israel in Exile, 3-5쪽). 그들에게 중요했던 네 가지가 다 없어졌습니다.

(1) 다윗 왕조의 몰락: 우선 다윗의 왕계가 무너져 버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원하리라고 약속했던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의심케 만들었습니다. 일찍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왕계의 영속성을 다짐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네 앞에서 물러나게 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처럼 그에게서 빼앗지는 아니하리라.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4-16).

그러나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 약속은, 후에 다윗의 후손 예수님을 통한 인류구원의 사건으로 건너뜁니다. 중간에 이스라엘 왕조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2) 약속의 상징인 땅의 박탈: 하나님과의 언약의 상징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터전인 ‘땅’의 상실도 같은 문제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약속의 핵심은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 중의 하나인 ‘땅’으로 설명이 되었습니다.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낸 근거는 하나님의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이었고, 이 약속을 위해 이스라엘은 광야의 40년을 겪어냈습니다. 그것은 범할 수 없는 하나님의 땅이었고,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의 지향점이며 터전이었습니다. 땅은 곧 하나님의 강복을 상징하는 삶의 현장이었으나, 이제 그 땅은 ‘빼앗긴 들’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땅일 수 있겠습니까?

(3) 종교지도자들의 상실: 셋째로 하나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제사로 이어주던 제사장들이 살육을 당하고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제사, 즉 공동체의 예배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그 백성 사이의 인격적 교통관계를 상징하는 중심체계가 사라진 것입니다.

(4) 성전 붕괴: 마지막으로, 무엇보다도 예루살렘의 성전이 불타버린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발등상이며(애 2:1), 여호와 하나님의 처소(處所)이고(왕상 8:13, 겔 43:7), 그분이 머물러 쉬는 장소였습니다(시 132:14). 그것은 하나님께서 선민(選民)인 그들 가운데 거하시면서 역사 속에서 자신들 편에 서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약속의 표증(表證)이며 그분의 임재 자체였습니다. 다른 모든 것이 망가진다 해도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은 훼파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그 근처에도 갈 수 없다는 성소가 바로 다름 아닌 이방인들의 손에 의해 불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떠나셨을 때 그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돌멩이와 나무때기였던 것입니다.

완전 파산입니다.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파산을 한 것입니다. 남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잃어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을 보고 애가서 기자는 섧게 울었습니다. 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애 1:1-2).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 이는 딸 내 백성이 패망하여 어린 자녀와 젖 먹는 아이들이 성읍 길거리에 기절함이로다”( 2:11).

4. 왜 우나요? 그냥 설움의 탄식만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봐 주시기를 기대하며 울부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애 3:49-50). 

우리 중에는 울지 않을 수 없는 분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눈물이 쏟아져 나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렇게 우는 사람들을 기억하며 중보합니다. 그리고 우는 분들에게 권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그냥 서러워 울지 말고 창조주, 구속주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약속이며 위로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

사람들 앞에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회개하면서 우십시오. 우리가 기쁨으로 살기를 원하시지만, 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할 때는 울라고 하십니다. 울면서 자신을 낮추라 하십니다.

“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10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약 4:9-10).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민족과 공동체의 운명을 아파하면서 우십시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이웃의 아픔에 같이 하면서 우십시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예레미야에게 눈물이 사명이었듯이, 우는 것이 예배며 사랑이며 사역인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울고 싶은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5.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뜻은 우리의 기쁨이지 슬픔이 아닙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 5:16-18). 억지로 슬퍼하고 울어야만 사명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바벨론 포로의 특수한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된 애가서의 눈물과 통곡이 우리의 일상의 모든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전 3:4).

애가서의 통곡을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울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통곡과 슬픔 중에도 종국적인 믿음의 삶은 기쁨과 소망임을 잊지 마십시오. 울어야 할 사람이 울어야 할 때 하나님 앞에서 우십시오.


jso8485@naver.com

[ 저작권자 © 아시아뉴스통신. 무단 전재 및 재배포금지]



제보전화 : 1644-3331    이기자의 다른뉴스보기
의견쓰기

댓글 작성을 위해 회원가입이 필요합니다.
회원가입 시 주민번호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포토뉴스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