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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산중서 기다림을 보다

[대구경북=아시아뉴스통신] 남효선기자 송고시간 2016-10-27 18:11

수비 '베즘마을' 투방집 풍경
경북 영양군 수하리 '베즘마을'에 자리한 300년이 된 투방집 전경./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겨울을 재촉하듯 가을비가 잦다.

농촌은 때늦은 가을걷이로 잦은 가을비를 피해 분주하다.

농업이 천대받는 지는 오래지만 그래도 수확으로 분주한 농촌은 황금물결로 넉넉하다.

기다림은 색깔이다.

기다림은 나뭇잎을 떨군 늦가을, 자작나무를 흔드는 바람이다.

바람은 계곡 바위를 어르며 흐르는 투명의 강을 얼리는 얼음 빛이다.

바람이 세찰수록 자작나무 흰 살갗은 더욱 또렷해진다.

기다림은 진홍빛 잎사귀를 메단 산벚나무, 키만 훌쩍 큰 산벚나무 적갈색 껍질이다.

산벚은 가을바람에 요동도 없이 온 몸을 내맡기고 있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골바람을 막으려 사방을 송판으로 막고 나지막하게 지붕을 덮은 산골집, 구들을 덥히는 흰 연기가 하늘로 오른다.

기다림은 발갛게 구들을 덥히고 머리를 풀어 하늘로 오르는 흰 연기다.

다홍빛 불꽃을 피워 올리며 장작은 제 몸을 태워 팔십 노모의 구들을 따뜻하게 데울 것이다.
 
수하리 베즘마을을 지키며 평생을 살아 온 '언남할머니'가 강아지와 함께 싸리비로 문칸길을 쓸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 기다림은 느릿느릿한, 그러나 질긴 힘

겨울로 들어서는 들녘은 온통 기다림으로 가득하다.

한 해 동안 제 핏줄을 살리고 제 살점을 채운 소중한 낱알들을 모두 비우고, 들판은 바람 속에 알몸을 맡기고 있다.

가을이 지나 겨울을 넘어 다시 따뜻한 바람이 불면 다시 들녘은 핏줄이 돋고 힘줄이 불거질 것이다.

기다림은 '비질'이다.

여든 네 해 동안 산중마을을 지켜 온 ‘언남’할미가 강아지 두 마리와 함께 문 앞길을 싸리비로 쓸고 있다.

할미가 혼자 키우는 염소도 새끼를 데리고 할미 곁을 맴돈다.

언남할미가 밥상을 물리고 제일 먼저 서두르는 일은 대문 앞 고샅길을 싸리비로 쓰는 일이다. 빗질을 멈추고 언남 할미는 대문 곁에 쪼그리고 앉는다.

할미의 흰 머릿결 위로 계란노른자만한 햇살이 한 줌 내려앉는다.
 
나무 뒤주와 무씨래기./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언남 할미의 '두지(뒤주;나무로 만든 창고)' 추녀 끝에 '무씨래기'가 바람에 흔들린다.

겨우내 언남할미의 양식이자 대처로 나간 자식네들에게 보낼 어미의 손맛이다.
 
300년 된 투방집을 지키며 살고 있는 김대준할아버지./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투방집 추녀 끝에서 익어가는 곳감./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300년은 족히 넘었을 투방집을 지켜 온 칠십 할미가 인기척에 손바닥만한 싸리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고 늦가을 마을 풍경을 보고 있다.

방안은 환한 대낮임에도 컴컴하다.

백발의 할애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지방을 건너 마당으로 나온다.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노랫소리가 모기소리만큼 가늘게 할애비와 함께 문밖으로 느릿느릿 걸어 나온다.

아비의 아비의 아비가 물려 준 투방집을 평생 지키고 가꿔왔듯이 할미와 할애비는 말하지 않아도 제 일이 무엇인지를 알아차리듯 순한 눈빛으로 낯선 방문객을 맞는다.

할미가 틀니를 드러내며 환한 웃음을 꽃처럼 피운다. 초가지붕에 제 홀로 피어난 박꽃같다.
 
300년 투방집의 안 주인인 '얌전이' 할머니의 모습이 박꽃처럼 환하다./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박꽃처럼 환한 300년 투방집을 지켜 온 안주인

평생 투방집을 지켜 온 할미의 이름은 '얌전이'이다. 호적 이름은 '통분(通紛)'이다.

열여섯에 울진 '굴구지' 마을에서 영양 수하 '베즘마을'로 시집 온 이래 친정인 굴구지마을과 영양읍내 장터 외에는 대처로 나가 본 적이 없단다.

지난해 가을 엮어 올린 초가 영개(이엉)가 골바람을 맞아 더 샛노랗다.

초가 영개 끝에는 곳감이 다홍빛으로 익어가고 있다.
 
300년 투방집을 지켜 온 두 주인이 나란히 가을볕을 쬐고 있다./아시아뉴스통신=남효선 기자

할미와 할애비는 오래된 감나무가, 뒷산의 꿀밤나무가 그렇듯 산중 외딴 투방집에서 겨울을 나고 봄이 오면 얼었던 텃밭을 갈아 종자를 뿌릴 터이다.

일월산 자락에 보일듯 말듯 자리한 산중마을 수하리 '베즘골'에서 김대준 할아버지 부부는 300년이 훨씬 넘은 '투방집' 을 조부 때부터 지키며 살고 있다.

기다림은 자연을 제 몸으로 끌어당겨 제 스스로 익힌, 느릿느릿한 그러나 질긴 힘이다.

산모랭이를 돌 때까지 할미와 할애비는 골바람 속에 한참을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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