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평생을 억울한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과 2세 교육에 헌신해 온 (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 김하종 회장. |
[아시아뉴스통신 = 손주석 기자]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우리가 과거의 참담한 비극을 다시 꺼내어 지면에 기록하는 이유는, 단순히 지나간 원한을 들추기 위함이 아니다. 이념의 광풍과 국가 폭력이 빚어낸 끔찍한 야만의 시대를 똑똑히 기억하고, 다시는 이 땅에 같은 아픔이 반복되지 않도록 뼈저린 교훈을 얻기 위함이다.
여기, 평생을 야만의 역사와 맞서 싸우며 억울한 원혼들의 한을 달래고 진실을 밝히는 데 헌신한 위대한 인물이 있다. 바로 (사)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경주유족회를 이끌고 있는 김하종 회장(95세)이다.
그는 전국유족회 특별법추진위원장 및 (사)한국전쟁유족회 정상화 추진위원장을 역임하며 오랜 세월 유족들의 권리 회복과 명예 회복에 앞장서 온 사령탑이다. 특히 참혹한 역사의 소용돌이와 사찰의 핍박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놓지 않고, 1970년 불국사 실업중학교 교장과 1975년 경주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1984년에는 영천시 영도고등학교(현 선화여고)를 직접 설립하며 평생을 2세 교육에 헌신한 이 시대의 진정한 등불이다.
본지는 이 위대한 횃불, 김하종 회장(95세)의 파란만장한 발자취를 따라 한국 현대사의 가장 아픈 상처인 '경주시 내남면 명계리 바탕골 학살 사건'의 진상을 5부작으로 심층 연재한다. 이를 통해 시대의 폭력이 평범한 양민의 삶을 어떻게 파괴했는지 조명하고, 부당한 권력과 수백억 원의 회유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한 지성인의 위대한 진실 규명 여정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
■ 훔친 벼를 들킨 적반하장, '이념'을 무기로 삼다
이 비극의 서막은 거창한 이념 대립이 아닌, 이웃이 훔쳐 간 '벼 다섯 가마니'에서 시작되었다. 1948년 가을, 명계1리에 이주해 온 박세현이 마을 주민 손 씨가 추수한 벼 다섯 가마니를 훔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전 동민이 찾아나선 끝에 박세현의 사랑채에서 잃어버린 벼를 발견했고, 손 씨 가족은 정당하게 자신의 벼를 되찾았다.
당시 이장이었던 김하근을 비롯한 동민들은 절도범 박세현에게 동네를 떠날 것을 요구했으나 그는 뻔뻔하게 버텼다. 오히려 앙심을 품은 그의 친동생 박도환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이협우의 '민보단'에 가입하면서 참극이 잉태되었다. 박도환은 절도범인 형의 죄를 덮고 복수하기 위해, 벼를 찾아준 이장 일가와 손 씨 가족들을 "빨갱이에게 협조하는 용공분자"로 조작해 밀고했다. '이념'이라는 단어가 개인의 사적 보복을 위한 완벽한 살인 면허로 둔갑한 순간이었다.
■ 피로 물든 칠석날, 30명의 목숨이 사라지다
1949년 8월 1일(음력 7월 7일 칠석날) 심야. 고요한 바탕골 마을에 이협우와 박도환을 비롯한 민보단원 10여 명, 그리고 내남지서 이홍렬 순경 등이 중무장을 하고 들이닥쳤다. 이들은 타겟이 된 집들을 쳐들어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날 밤, 김 씨 문중 4가구 22명과 손 씨 가족 8명 등 총 30명의 무고한 생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평범한 농부와 아낙, 어린아이들까지 이념의 희생양으로 차가운 주검이 되었다.
학살을 자행한 이협우 일당은 바탕골에서 4km 떨어진 마을로 이동해 "빨갱이에게 협조하는 자들을 죽였으니 시체를 매장하라"며 뻔뻔하게 자랑을 늘어놓는 악마성을 보였다. 이념의 탈을 쓴 사적 복수가 평범한 양민들을 얼마나 무참히 짓밟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바탕골의 비극'이다. 당시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피눈물을 삼켜야 했던 유족들의 가슴 속에는, 훗날 세상을 뒤흔들 거대한 진실 규명의 씨앗이 뿌려지고 있었다.
이 암울했던 야만의 시대를 회고하던 올해 95세의 김하종 회장은 끝내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지 못하고 목이 메었다. 가려진 역사의 참혹한 진실을 마주한 취재 현장, 기자 역시 숨을 죽인 채 앞으로 밝혀질 2부의 기막힌 사연을 더욱 애달프게 기다리게 된다.
(2부 '살인귀는 금배지를 달고, 유족은 피눈물을 삼켰다'에서 계속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