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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이야기-71

[대전세종충남=아시아뉴스통신] 홍근진기자 송고시간 2018-04-01 10:31

[기고]천지의 신령스런 기운이 내 마음에 머물게 한다
남북통일 기원 유라시아대륙 횡단 평화마라토너 강명구
본지는 지난해 9월 1일 네델란드 헤이그를 출발해 1년2개월 동안 16개국 1만6000km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중국과 북한을 거쳐 휴전선을 넘어 대한민국 품으로 돌아올 예정인 통일기원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씨의 기고문을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다.[편집자주]
 
투르크메니스탄 마리와 바이라말리를 지나니 이제 거대한 사막의 진면목이 드러났다.(사진=김창건)

마리를 지나고 바이라말리를 지나니 이제 거대한 사막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오직 모래와 죽은 듯 살아있는 관목들, 얼핏 보면 아무것도 살 것 같지 않은 이 저주받은 땅에도 바람 속에 끊임없이 몸을 뒤채며 다른 세상을 꿈꾸는 생명들이 있다.

치열하게 살아가는 생명이 있다. 이 광활한 벌판에서는 다른 세상을 꿈꾸며 거센 바람맞으며 치열하게 달리는 나그네의 발걸음도 그런 생명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작고 초라하다.
 
나는 사막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아진 나는 대자연에 녹아들기 더없이 좋아진다.

이곳에서는 번뇌 망상과, 탐욕, 노여움이 일어나지 않으니 자연 마음의 수양이 된다.

그러다 ‘도인이 뭐 별건가!’하는 자만심이 드니 그것마저도 금방 다스릴 줄 알게 되었다.

바람 같이, 바람에 날리는 모래먼지 같이 하늘 아래 끝없이 퍼지는 야생화 향기처럼 발걸음도 그저 바람에 얹어 본다.
 
대자연의 정령들과 하나가 되는 의식을 치르노라면 나 자신이 더 강해지는 것 같다.(사진=김창건)

나는 하늘과 땅, 모래와 관목, 바람과 침묵, 소와 양, 낙타와 이름 모를 새들. 도마뱀과 개미 등 이 대자연의 모든 정령들과 하나가 되는 경건한 의식을 치른다.

‘천지영기 아심정 (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 (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 (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 (我與天地 同心正)'

천기기운 나의기운 마음으로 하나 되어/ 세상만사 여의롭게 내 마음에 통한다네./ 천지는 나, 나도 천지 한 몸으로 감응되어/ 내 마음이 천지마음 하나 되어 바른 마음'

원불교의 주문인데 이 카라쿰 사막에서 대자연과 하나 되고 고통을 이겨내며 달리기에 딱 좋은 주문이어서 나는 끝없이 이 주문을 외우며 힘든 발걸음을 옮긴다.
 
대를 이어가며 더위와 추위 거센 바람을 이기며 살아가는 이곳의 생령들과 하나가 되는 의식을 치르노라면 나도 더 강해지는 것 같다.

연간 강수량이 고작 백 미리 정도 내리는 척박한 땅에는 사막 한가운데서 시작하여 사막 한가운데서 사라지는 강들이 있다.

이런 곳에 오아시스 마을이 들어서고, 사람들은 운하를 만들고 밭을 일구기 시작했다.

마을을 중심으로 낙타와 양, 소를 방목하고 지하에는 축복의 선물인 석유와 천연가스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매장되어 있다.

가난과 핍박은 완고한 것이어서 이 축복의 선물도 사람들을 가난에서 건져주지는 못한다.

가난과 핍박의 질곡이 아무리 깊어도 산 자는 산다. 살아서 사랑하고 번식한다.
 
초원의 어린 아이들은 학교가는 대신 아버지를 따라 회초리를 들고 들판으로 나간다.(사진=김창건)

목동들은 이른 아침부터 가축들을 몰고 들판으로 나간다. 어린 아이는 학교를 가는 대신 아버지를 따라 회초리를 들고 가축을 능수능란하고 몰려 들판으로 나간다.

오늘 아침에는 저 앞에 한 목동이 양과 염소, 당나귀를 몰고 가는데 당나귀란 놈이 대오를 이탈해서 남의 밀밭으로 뛰어 들어갔다.

개와 목동이 당나귀를 뒤쫓아 뛰어가지만 역부족이다. 목동은 발만 동동 구르고 당나귀는 신나게 별식을 포식한다.

당나귀란 놈 오늘 저녁 치도곤을 당할 생각을 하니 내가 다 등에서 땀이 난다.
 
이런 곳에 삶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유목민이라 부른다. 이런 사람들에 의해 오아시스 도시는 징검다리처럼 연결이 되어있다.

그 징검다리의 도움으로 카라반들은 거친 파도를 해치듯이 사막을 헤쳐 나간다.

뿐만 아니라 유목민들과 카라반에 의해서 농경사회가 고립되지 않고 서로 연결되기도 했다.

수천 년 동안 이들은 낙타 등 위에 실린 진귀한 물건들의 긴 행렬을 보면서 아련한 꿈을 키워온 사람들이다.

보통 대상들의 행력은 낙타가 1000 마리에서 5000 마리가 움직였다고 하고 기록에 남은 최고는 만 마리의 낙타 행렬이 이어졌다고 하니 상상하는 것으로도 장관이었을 것이다.
 
사막의 붉은 비단이 융단처럼 대지에 펼쳐지고 그 위에 수가 놓이듯이 장신된 관목들.(사진=김창건)

붉은 비단이 융단처럼 대지에 펼쳐지고 그 위에 수가 놓이듯이 장신된 관목들, 해가 뜨고 아침 이슬을 말려내면 태양은 금방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그 아래 끝없이 이어지는 불굴의 발걸음, 낙타의 목에 걸린 은방울소리, 하늘하늘하고 화려한 비단을 싣고 모래먼지 날린다.

광야를 가로지르는 낙타의 발자국소리. 고향과 가족을 향한 지독한 향수는 어렵사리 찾은 오아시스로도 위안을 삼을 수 없다. 
 
삼장법사로 알려진 현장과 마르코 폴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낙타 등에서 단조로운 풍광에 지루해서 졸거나 피곤에 졸면, 깜빡 대열에서 낙오된 자신을 발견한다.

완전한 적막과 이정표도 없고 발자국도 금방 바람에 지워지는 길 위에서 환청으로 들리는 “여기야, 이리와!”라는 동료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그 소리를 따라 사막 한가운데서 헤매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막의 해골로 여기저기 뒹굴게 된다. 
 
한 목동이 몰고 가던 당나귀가 대오를 이탈해 남의 밀밭에 들어가 포식을 하고 있다.(사진=김창건)

낙타와 말은 원래 북아메리카가 원산이라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1만3000여 년 전 소빙하기 때 지금의 알래스카와 시베리아의 동부지역이 육로로 연결되었다.

이때 아시아로부터 아메리카 원주민이 넘어갔고 낙타와 말이 넘어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낙타와 말은 아메리카에서는 멸종을 하고 유라시아로 넘어 온 것들이 살아서 진화를 했다고 한다.
 
몽골의 스텝지역의 추운날씨에도 견디는 낙타는 쌍봉낙타이고 중앙아시아의 더운 사막에서 사는 낙타는 단봉낙타이다.

단봉낙타는 젓을 이용하기도 하고 걸음이 빨라서 전투용으로도 이용했다고 한다.

북아메리카에서 멸종된 낙타는 아시아에 들어와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했다.

이들은 다른 포식동물들이 생존하기 열악한 환경인 사막 속에 뛰어들어서 그 속에서 살아남는데 성공한 것이다.

낙타는 먹을 것이 풍부하고 생활환경이 쾌적한 대신 늘 포식자들의 공격으로부터 두려움과 공포로 살아가는 대신 먹을 것과 환경이 열악한 곳에서 마음 편하게 사는 선택을 했다. 
 
중앙아시아의 사막에 사는 단봉낙타는 젓을 이용하고 걸음이 빨라 전투용으로 썼다.(사진=김창건)

낙타의 환경 적응능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더위와 추위와 물과 먹을 것이 부족한 열악한 조건에서도 잘 견뎌낸다.

그런 끈기와 인내로 그들은 사막에서 자유를 얻었다. 그들은 말이나 마차가 다니지 못하는 좁은 길과 늪지와 모래밭이나 거친 자갈밭까지 자유로이 다닐 수 있다.

낙타의 등에 있는 것은 지방덩어리이다. 낙타는 사막의 가시 박힌 식물도 잘 먹고 소화를 시킨다.

신장 기능이 뛰어나 소금물까지도 마실 수 있으며 100리터의 물을 한 번에 마실 수도 있다.

낙타의 눈썹은 모래바람이 불어도 견디기 좋게 잘 발달되어 있다.

낙타는 기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문명과 문명을 연결해주는 사막의 특급열차 역할을 오랫동안 충실하게 해주었다.
 
유목민들은 거친 음식과 거친 잠자리에서 잠을 자더라도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이다.(사진=김창건)

유목민들도 생존을 위해서 낙타와 비슷한 선택을 하였다. 유목민들은 모두 프리랜서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정주민들은 땅을 가진 영주 밑에서 대부분은 농노와 같은 생활을 했었다.

철저한 신분제도의 피라미드 구조 하에 하층민으로 살아가느니 다소 거친 음식과 거친 잠자리에서 잠을 자더라도 자유롭게 살고 싶은 이들이 이런 삶을 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유목민들은 농업 국가들의 농경민에 비해서 훨씬 쉽게 먹거리를 구했고, 훨씬 편하게, 훨씬 오래 살았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동쪽 유목지역으로 유출되는 인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리스인이나 로마인이도 주위의 훈족이나 다른 유목민족으로 넘어갔을 때 고향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잘살게 되었다고 한다. 
 
등에 실린 짐이 누구의 짐인지도 모르고 뚜벅뚜벅 걷는 낙타들의 행렬 같은 삶이다.(사진=김창건)

인간은 이렇게 살아남은 낙타를 실크로드의 사막과 초원지대를 이동할 때 짐꾼으로 이용하였다.

낙타는 자신의 등에 실린 짐이 누구 것인지, 왜 짊어져야 하는지 모른 채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투르크메니스탄에 와서 느낀 것인 이곳의 사람들이 매우 경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원에서 그렇게 낙타처럼 자유롭게 살던 사람들이 정주마을을 이루고 모여서 경직된 정권의 여러 가지 제약 속에 일상을 보내고 있다.

자기의 등에 실린 무거운 짐이 누구의 짐인지도 모르고 뚜벅뚜벅 걷는 낙타들의 행렬 같은 삶이다.
 
이들의 고단한 삶을 뒤로한 채 대자연의 정령들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천지영기 아심정 (天地靈氣 我心定)/ 만사여의 아심통 (萬事如意 我心通)/ 천지여아 동일체 (天地與我 同一體)/ 아여천지 동심정 (我與天地 同心正)’을 읊조리며 옮기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사외 기고는 본사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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